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캐나다사는 마케터 Z Jan 01. 2024

아빠, 그러게 있을 때 잘하시라고 했잖아요

엄마 말고 아빠의 빈 둥지 증후군

  

침내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비자 기준 워킹홀리데이 시작 하루 전, 그러니까 출발 당일.

바로, 공항으로 떠나는 날.


시차 적응 계획은 완벽했지만

캐나다 - 한국 간 시차가 대략 14시간 정도이고, 비행시간이 13시간이 조금 넘어간다고 해서 처음부터 시차적응을 위한 아침 10시 비행기를 예약했다.

비행시간 동안 내내 자고 일어나면 다시 아침 9시가 되는 매직!

공항에 3시간 전에는 도착해야 하니 이동시간을 고려해서 새벽같이 집을 나섰는데, 이동하는 내내 왜 이렇게 꿈같던지... 잠을 안 자서 비몽사몽 한 것도 아니고, 그냥 현실 같지가 않았다.

어둡고 싸늘한 밤 길, 달리는 차 안에 함께 있는 가족들, 웃으며 말하지만 아주 미묘한 공기.

그럴 만도 했다. 학교 때문에, 직장 때문에 몇 번 나가서 살았던 것을 제외하고는 무려 30년이란 시간을 복작복작 한 집에서 살아온 것이다. (심지어 우리 가족은  가족끼리 모여 시간을 보내거나 함께 삼시 세 끼를 즐기는 일이 매우 흔했다.) 말하자면 강산이 세 번 변하는 시간이다.


내 허리야, 일반 좌석을 견딜 수 있겠니?

내가 탈 비행기는 인천 - 토론토 직항노선.

비행기표를 예약할 때 좌석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허리 디스크 덕분에 한 자세로 오래 앉아 있기 힘든 상태인데, 약 13시간을 비행하면서 계속 한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하다니!


비행이 두 번으로 나뉘어 몸이 좀 덜 아픈 대신 모든 짐 도합 35kg을 끌고 움직여야 하는 경유노선

Vs. 비행이 한 번이라 몸에 무리가 갈지도 모르지만 일단 내 몸만 챙기면 되는 직항노선


내가 공항까지 들고 간 짐의 무게는 23kg 캐리어 두 개, 기내용 가방 10kg였다.

이미 허리 문제로 엑스트라 레그룸까지 예약한 상태라, 차마 오버차지를 하면서까지 짐을 들고 갈 자신이 없었다. 눈물을 머금고 필요한 것들 중에서도 필요한 것들만 모아 23kg을 정확하게 맞출 수밖에.

캐리어 무게를 넘어버린 나머지 것들은 기내용 가방에 쑤셔 넣어 10kg를 정확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이니 결국, 공항에서 짐을 들고 옮기는 문제 때문에 내 한 몸이라도 잘 챙기기로 했다.

직항노선으로 결정했다는 뜻이다.

물론 각 공항에는 카트가 다 있고, 공항에서 길 찾기도 어렵지 않지만, 레일에서 캐리어를 내리거나 그놈의 기내용 가방을 들고 입출국 검사장을 지나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로 한 것. 무게 규정도 무게 규정이지만 일단 거기서 더 무거웠으면 내 허리가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공항에서 셀프 백드롭을 이용하니 캐리어 무게가 25kg까지 허용되었는데, 당황했으나 어쨌든 그 덕에 기내용 가방을 2kg 줄일 수 있게 됐다. 그런데도 캐나다로 가기 위해 지나는 출국짐검사가 엄청 오래 걸려서, 8kg을 들고 돌아다니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더라.


현실 자각 타임은 바쁜 일이 끝난 이후에

이런 상황이니 공항에 했을 때는, 온 가족이 이 짐을 내가 들고 옮길 수 있을 것인가에 집중하느라 복작복작 붙어살 던 가족이 1년 동안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잊고 있었다.

식은땀까지 흘렀던 셀프 백드롭이 끝나고 나서야(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셀프백드롭은 어렵지 않다. 내가 급하게 무게를 옮기느라 문제가 생겼을 뿐.) 가족들의 얼굴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공항에 빨리 도착한 덕택에 여유 시간이 생긴 상황.

그제야 실감이 났다.


그러니까 있을 때 잘 대해달라고 했잖아요

출국장에서 출국심사를 받기 위해 줄을 서야 했는데 부모님이 길이 줄어드는 것을 너무 아쉬워하셔서 두 번이나 줄을 벗어나 뒤로 돌아갔다. 그러고도 모자라 결국 줄 밖으로 벗어났다.

늘 눈물이 많던 엄마야 그럴 줄 알았지만, 그렇게 무뚝뚝하던 아빠마저 눈시울이 붉었다. 여유시간이라고 말했지만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출국장의 줄은 길었고, 탑승게이트는 멀고 내 걸음은 느렸으니까. 결국 건강히 계세요, 건강히 지내, 잘 지내 뭐 그런 상투적인 말 몇 마디와 함께 다시 줄에 올랐다.

아빠와 포옹을 해 본 게 대략 몇 년만의 일쯤 되는 듯했다.

대화 좀 하자고 그렇게 알짱댈 때는 몇 마디 하시고 귀찮아하시더니, 짧지도 길지도 않은 1년의 이별을 앞두고는 서운해하시는 게 눈에 보였다. 오히려 엄마가 의연해 보일 정도로.

농담 반 진담 반 아빠에게 서운한 일이 있거나 떠오를 때마다 제가 집에 있을 때 잘해주세요, 집에 있을 때 곱게 키워주세요라고 하곤 했었는데. 나도 그게 진짜가 될 줄은 몰랐지.

인생 정말 모를 일이다.

딸과 대화가 부족했던 아버지는 드디어 딸이 집을 나가버리는 사태와 직면해버리고 만 것이다.

"물건 잘 챙기고 건강하고"

겨우 들은 말은 이 것이었다.


아빠의 빈 둥지 증후군

혼자도 살아봤고, 혼자 살면서 참 잘 살았고, 여행도 혼자 잘 다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집(가족)을 너무 많이 사랑해서 문제였다. 그래서 공항에서 울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웬 걸, 가족 중에 가장 무덤덤한 사람이 나였다!

어쩌면 한 점 후회 없이 최선을 다했다는 반증일지도 모르겠다. 힘들게 출국심사를 통과해 비행기를 타고 캐나다까지 13시간. 그리고 도착한 캐나다에서 처음으로 받았던 영상 통화.

어머니 왈, 평소에 그렇게 퉁명스럽던 아빠는 내가 비행기를 타자마자 눈물을 보이셨다고 한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결국 모두가 나아지겠지만, 아빠에게서 오는 영상통화는 여전히 좀 신기하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 워킹홀리데이 일기는 나와 가족이 모두 성장하는 이야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