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지안 Mar 04. 2021

당신의 일상은 어떤 모양인가요

점이었던 시절

배가 고팠다. 냉장고 문을 열면 만족스럽지는 않아도 요기할만한 무언가 항상 있었다. 그중 제일 당기는 반찬통을 꺼내 식탁위에 던져놓는다. 희한하게 밥통에는 한 명 먹을 만큼의 밥은 항상 있었다. 밥을 퍼서 식탁에 놓고 꺼내놓은 반찬과 함께 먹으면 간단하게 식사가 끝난다.


설거지 거리는 싱크대에 대충 던져 놓고, 커피 마신 컵도 그 위에 올려놓는다. 굳이 꼭대기에 올려놓는 것은 뒷처리를 염두에 두지 않았을 때 나올 수 있는 행동이다. 그런 식으로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잠이 오면 잠을 자고, 씻고 싶으면 씻고, 과제가 생기면 즉각 해결이 되는 일상을 나는 꽤 오랫동안 살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에게 일상은 점 모양이었다. 주변 것과 연계가 되지 않은 채 여기저기 독립적인 과제가 산재해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매일 부딪히는 과제들이지만 오로지 그것만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마치 냉장고를 열면 먹을 것이 놓여있듯이 말이다


문제의 수준은 해결의 방식에서 결정된다고 그랬던가. 이렇게 쉽게 해결되는 일 천지인데, 일상을 살아내는 것이 나에게 어려울 리가 없었고, 그 모든 것이 가능한 집이라는 공간은 나에게 가장 쉬운 곳이었다. 점. 어떠한 부가적인 행동이나 고민 따위가 필요없는 하나의 점. 그것이 나의 일상이었다. 



선이되던 순간

그러나 독립을 하자마자 나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솔직히 말해, 장을 보는 것 자체가 일인줄 몰랐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장보기가 데이트의 연장이거나 아니면 혼자 망중한을 즐기는 낭만적인 일로 묘사되기 일쑤인데, 실제로는 낭만은 개뿔 그냥 과제 해결을 위한 가장 첫 단계에 불과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예산의 범위 내에서 모자라지 않되 나중에 뒷처리가 가능한 정도의 식재료를 구매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처음 1년 동안은 먹는 것 반, 버리는 것 반이었다. 마트에서는 다 먹을 수 있을 거 같아서 샀는데 막상 요리를 하고 보면 생각보다 많이 남았고, 집에서 밥 먹을 일이 그리 많지 않다보니 언제나 노란 음쓰봉투는 배가 빵빵해서 버려졌다. 낱개로 파는 양파와 감자는 그 모양 그대로 진물을 가득 먹은 채 썩어나갔다.

일상은 방심을 용납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배가 고플 때는 하나의 과정이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장을 보러가서 적당한 양을 구입한 다음 최대한 음식물 쓰레기 양을 줄이며 밥을 한다. 그리고 남은 것은 냉장고 안에 잘 두었다가 다음에 재활용할 매뉴를 생각한 후, 마지막으로 설거지까지 완료해야 '배고픔'이라는 기본적인 과제가 해결된다. 


이것은 점이 될 수가 없다. 각각의 지점과 행위들이 하나의 과정으로 엮이는 선의 모양이며, 집을 짓듯 하나씩 완성해가는 노동의 과정에 가깝다. 끼니를 비롯해 집안의 일상적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모든 행위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일상은 나에게서 과제를 거두어간다. 결국 일상도 노동이라는 단순한 진리에 도달한다.


점, 선, 그리고 삶

노력하다보면 언젠가는 내가 그려놓은 점들이 하나의 목표를 이루는 선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스티브잡스의 유명한 연설이 있다. 많은 이들이 그의 말을 인생의 지침으로 삼기도 했고, 나 역시 그의 말을 들으며 현실에 최선을 다하며 살자고 다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가 진짜로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일상, 더 크게는 인생의 본질에 관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산다는 것은 그냥 노동하는 것이다. 6평 남짓하는 내 조그만 공간 하나도 책임을 지기 위해선 매일 이렇게 무릎 시리게 노동의 선을 타고가야 하는데, 삶 전체로 봐서는 오죽하겠는가. 나도 인생은 마음에 달렸어 따위의 따뜻하고 낭만적인 말을 하고 싶다. 그러나 고달픈 자취 생활 속에서 얻은 진리에는 단맛이라곤 1g도 없었다. 그냥 허겁지겁 살아내다보니 입에서 단내가 났을 뿐.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일상은 점이 아닌 선이다. 그리고 삶 전체도 아마 그럴 것이다. 노동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작동하지 않을 것이며, 꿈이고 나발이고 생각할 기회조차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일상은 절대 방심을 용납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노동해야 한다. 눈물이 다 나려고 한다. 그러나 어쩌겠나. 그게 진실인걸. 오늘도 나는 야근을 하고 돌아와 미뤄놓은 설거지부터 했다. 이제부터는 방에 펼쳐놓은 양말 중에서 잘 마른 놈을 골라 하나씩 정리해야겠다. 마지막으로, 내 일상이 점 안에서 안주할 수 있게 해주었던 엄마의 숨은 노동에 무한한 경의를 표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 방에 치킨과 피자 박스는 허하지 않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