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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지안 Mar 15. 2021

왠지 이 사람의 팬이 될 것 같다

유퀴즈를 보고서

사실 언젠가부터 누군가를 열렬히 좋아하는 게 힘들다. 정확히 짚을 수는 없으나, 대략 내 몸이 만성적으로 지치고 정신력이 바닥나기 시작했을 때, 쉽게 말해 내가 먹고 살기 힘들어 죽겠을 그 순간부터 누군가의 팬이 된 적이 없다. 사적인 영역(연애)에서나 연예인을 상대로 해서나 누군가를 순수한 의미로 좋아하는 것도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누굴 좋아하기가 너무 힘들다.


며칠 전에 우연히  유퀴즈라는 프로그램을 봤다. 찾아보는 프로는 아니고, 간혹 너무 자극적이지 않되 그래도 애지간히 간이 돼 있는 프로그램이 당길 때 보는 프로그램이다. 표현이 너무 추상적이었다면 이렇게 말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간이 센 것을 원할 때는 라디오스타를 본다. 이해가 될 것이다.


아무튼 그날은 이직의 고수들을 주제로 편성했는데, 진기주라는 낯선 이름의 배우가 출연했다. 얼굴은 본 적이 있는데, 이름은 낯선...요즘 라이징하는 배우인 갑다 정도로 생각하면서 봤다. 배우라 당연히 예쁘지만 뭔가 자연스러움이 있는 외모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계속 본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사람, 경력이 조금 특이하다. 처음에는 삼성SDS에 입사해서 3년 동안 다니다가 퇴사했다. 그리고 강원 방송국 기자로 다시 입사, 혹독한 수습기자 생활을 마치자마자 다시 퇴사. 그리고 어떻게든 돌파구를 만들어보기 위해 나간 슈퍼모델 대회에서 입상하여 앤터 쪽에 발을 들여 놓는다.


그런데 누구 하나 써주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연기 전공도 아니고 경력도 없고, 그 바닥 평균에 비하면 나이도 많고 외모도 예쁜 일반인 느낌이니 어느 감독의 눈에나 평범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오디션에서 어느 좋은 감독 덕분에 2015년에 데뷔하여 지금까지 조금씩 영역을 넓혀 왔다고 한다.


아!!!


그제야 생각이 났다. 리틀포레스트라는 영화를 재밌게 봤었는데 거기서 김태리 고향 친구로 나온 그 배우. 실제 그곳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살짝 도회적이었는데(류준열은 진짜 그곳 사람 같았다), 싱그러운 촌티가 살짝 있었던 배우가 기억이 났다.

아 그 사람이구나. 좋게 봤었는데....이제는 유퀴즈에도 나올 만큼 많이 유명해졌나 보네. 내가 다 흐뭇했다. 그리고 말도 단정하게 잘 하는 편이었다. 나는 의외의 사람에게서 울림이 있는 말이 튀어나올 때 금사빠가 되곤 한다. 평소에 그런 고민을 하고 살지 않으면 카메라 앞에서 말로 구현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유재석씨가 마지막에 배우라는 직업은 어떤 거 같냐고 물었다. 꿈을 이뤄서 좋아요 정도의 대답을 예상했는데,


지금까지 내가 했던 일 중에 가장 불안정적이고, 자존감도 제일 많이 깎이고 상처도 많이 받지만, 그럼에도 제일 잘하고 싶은 일이에요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내 마음 속에서 가장 갈망하던 것을 어느 배우가 말하고 있었다. 이어서 유재석씨가 '어떨 때 내가 이직하길 제일 잘 한 것 같으냐'고 묻자


더이상 다른 생각이 나지 않아서 


라고 대답한다. 이 한방에 나는 거의 실신 직전이었다. 회사를 나가면서도 항상 무언가 내 마음 속에 얹혀있는 게 있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때도 있고 막 토해내고 싶을 때도 있었는데, 그것의 정체를 나도 모르고 있었다. 몸만 왔다갔다 하지 계속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과연 내가 이곳에서 일에만 집중하면서 계속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마냥 시간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에 대한 의구심을 버리지 못 하고 있다. 나에게 현재가 최선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하니 하루하루가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가 없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요즘 정신과 약을 먹으면서 출근하고 있다. 어느날부터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병원에 갔더니 진정제와 항우울제를 처방해 줬다. 밥은 걸러도 약은 꼬박꼬박 먹고 있지만, 사람의 마음이란게 약으로 싹 나을 수도 없다. 계속 그렇게 정체가 무언지도 모를 허들에 결려 땅바닥에 나뒹구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젊은 배우가 그게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었다.


더이상 다른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현실에 몰두할 수 있는 삶. 그 순간 이 배우가 좋다 못해 부럽기까지 했다. 나도 저렇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막 솟구쳤다. 영상을 10번은 넘게 돌려봤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아무것도 알 수 없어 혼란스럽기만 한데, 나이는 어느덧 40이 넘어버렸다. 남들은 이제 안정을 찾으라는데 난 당장이라도 있는 걸 버리고 마음이 시키는 것을 하고 싶다. 그러나 내 나이에서 확률이 어느정도 있는 대안을 찾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진기주 배우는 그걸 해낸 것이다. 물론 진기주 배우는 예쁜 외모나 상대적으로 어린 나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자기가 가진걸 놓는다는 건 어느 나이에서나 쉬운 게 아니다.


이직 하려면 지금 자기가 가진 것을 내려놓아도 괜찮은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이 사람 끝까지 날 그냥 보내주지 않는다. 나의 번민이 깊어질수록, 왠지 이 사람의 팬이 될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바라보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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