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과의 첫만남
중학생이었다. 시험을 며칠 안 남겨두고 있었고, 나는 수학 시험 준비에 열중하고 있었다. 읽고 이해하고 원리를 파악해서 답을 구하고...사실 수학만큼 단순 반복적인 공부도 없다. 원리가 이해가 된다면 그다음부터는 말그대로 '계산노동'에 불과하니까.
그렇게 문제집의 페이지가 넘어갔다. 한페이지가 클리어 되었고, 다음 페이지에 있는 문제들도 큰 탈 없이 해결되었다. 차곡차곡 그렇게 나의 손길을 기다리는 문제들이 무장해제하듯 풀려나가는 와중에 문득 강렬한 무언가가 내 머리 어딘가를 때리는 것 같았다.
근데 진짜 시험에서는 이해를 못해 틀리면 어쩌지?
이유도 알 수 없는 이상한 불안감이 나를 덮쳐왔다. 그냥 집중력이 떨어지는 데서 오는 그런 혼란과는 성격부터가 달랐다. 진짜로 그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문제가 술술 풀려나가지만, 며칠 뒤에 있을 시험장에서는 문제지가 백지로 보일 것 같은 공포와 함께 내가 아무것도 이해 못 하고 시험장을 뛰쳐나갈 것 같은 불길한 상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불안은 점점 강해졌고, 몸은 뻣뻣하게 굳어갔다. 기어코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내가 지나온 문제들을 하나씩 복기해보았다. 그렇게 수월하던 문제풀이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내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것이 처음 보는 문제처럼 느껴졌다. 다시 풀어보라면 못 할 것이 자명해보였다.
이게 뭘까. 나를 강하게 붙드는 혼란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시험지의 한쪽을 꽉 움켜쥐었다. 몸에 힘이 들어가더니 북~하며 시험지의 절반이 찢겨 나갔다. 내가 했지만 내가 한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한쪽 면이 없어져버린 시험지를 응시하며 나는 무언가가 있음을 처음으로 느꼈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분명 내 편은 아닐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불안장애와 나와의 동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던 잠시의 혼란은 나비의 날개짓이 되어 나의 젊은 날을 점점 먹어치워갔다. 오늘은 하나가 안 되면 내일은 두개가 안 되는 식으로, 불안은 나의 일부를 조금씩 허물어 갔다. 나는 무너져내리는 일부를 붙들어보려 갖은 애를 썼지만, 그것들은 가는 모래가 되어 손가락 사이사이를 빠져나갔다.
사람을 앞에 놓고도 설명하기 힘든 대상을 글로 표현하니 참 난감하다. 가뜩이나 이걸 남들에게 보여야 하다니. 그러나 20년도 더 지난 이 시점에서도 그날의 첫만남은 너무 또렷하게 기억난다. 우리의 첫만남은 그랬다. 그때부터 우린 싸우고, 화해하고, 때론 무시하고 괴롭혔다. 그 20년의 역사를 말하려고 한다.
혹시나 이게 무슨 말인지 충분히 알아듣는 독자가 있다면 같이 힘을 내보자는 말도 덧붙인다. 고통의 결이 다르듯이 다루는 자신만의 방식도 다 다를 텐데, 어찌 되었건 아픔은 나눠서 나쁠 것이 없다. 같이 나누고 같이 점점 더 가벼워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