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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지안 Mar 01. 2021

나가 살 때가 되었군

거주의 독립은 아버지로부터의 독립이었다

생뚱맞은 이야기지만 나는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다. 매우 안 좋다. 연락 차단한 지는 오래 되었고, 가끔 얼굴 봐도 인사도 잘 안 나눈다. 누가 보면 세상천지 저런 불효자가 없다고 욕할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게도 오랫동안 응어리진 사연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면, 내가 그 분을 그렇게 대하는 데 대해서 죄책감을 느껴본 적이 없다. 오히려 오랜 세월 같은 공간에 살면서 미움을 많이 가져봤을 지언정.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휴일이었고 날씨가 화창했다. 늦잠을 자고 가벼운 몸으로 거실에 나왔더니 아버지가 TV에 열중하고 있서 인기척도 못 느꼈다. 뭘 저리 보나 했더니 WWE, 즉 미국 프로레슬링 경기였다. 근육 주렁주렁 단 어떤 아저씨가 로프에 올라 또다른 헬창 아저씨를 덮치고 있었다. 요즘은 애들도 안 볼 정도로 다 짜고 하는 게 눈에 보이는데, 아빠는 유치원생처럼 거기에 빨려들어갈 기세였다. 


그 순간이었다. 이제, 같은 공간에서 저 분과 같이 사는 일상의 유통기한은 여기까지구나 생각이 들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프로레슬링이 그 정도로 몹쓸 짓도 아니로(살짝 유치하기는 하지만), 70을 앞두고 있는 노인이라도 휴일에 재미삼아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휴일 낮에 그걸 틀어놓고 보고 있는 아버지의 뒷모습은 도저히 내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고등학생 때였나, 그 분은 자주 술에 취해 들어왔고, 그때마다 가족들에게 온갖 짜증과 분노를 쏟아냈다. 어린 내가 봐도 그것은 우리 가족의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남에게 군림하고픈 욕망에 비해 성격이 소심하고 사람관계에 늘 서툴렀다. 그래서 직장생활을 오래 하지 못했는데,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술에 취해 가족들에게 정서적 학대를 했다. 나는 그 순간마다 나에게 무슨 책임이 있는지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내게 잘못 따위는 없다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냥 그 순간이 지나가길 바랄 뿐이었는데, 어느날은 맨발로 현관문을 걷어차 유리가 온 사방에 튄 적이 있었다. 술 취한 그 사람의 발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놀란 다른 가족들은 그냥 멍하니 광경을 지켜만 보고 있다가 불호령에 유리를 치우고 발에 피를 닦고 하였던 기억이 난다. 술취한 아버지는 육체적인 면에서만 나를 압도할 수 있는 그런 존재였던 것 같다. 


WWE는 마초엔터테인먼트의 상징이다. 몸을 써서 상대를 제압하는 아주 단순한 룰을 링 위에 그대로 재현해 놓았고, 출연진들은 그런 쇼의 성격에 맞게 과한 몸을 만든다. 그런데 나이가 지긋이 들어서도 WWE 보는 아버지는 왠지 소싯적 마초적(?) 취향이 그대로인 것처럼 느껴졌다. 몸이 늙어 이제는 안 되지만 그럴 수 있다면 예전에 했던 것을 다시 하고 싶은 욕망이 투영된...비약일 수 있으나 논리를 뛰어넘는 직감은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평소 몸쓰는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아버지가 그토록 못 마땅했고, 그날 결국 결심이 섰다. 나가 살아야겠다. 내 나이 38살이었다. 그 시간까지 같이 산 것이 용한 나이였다. 




2018년 3월 7일. 그렇게 나의 늦은 자취는 시작되었다. 원래는 동생이 6개월쯤 살던 집이었는데, 동업자가 같이 살자는 제안이 와서 비어있었고, 덕분에 명의를 돌려서 들어갈 수 있었다. 6평도 안 되는 반지하 자취방. 그곳에서 나의 일상은 전혀 다른 국면을 맞았고, 세상을 보는 나의 관점은 완전히 바뀌었다. 굳이 부연하자면, 전에는 온실속 잡초였다면 지금은 광야의 열매수다. 환경은 거칠어졌지만 쓸모는 훨씬 많아졌다. 그래서 소중한 친구들에게 늘 말한다. 


결혼은 자취인이랑 해라


무엇이 그렇게 달라졌는지 차근차근 말하겠다. 사실 별건 아닌다. 터득했다기 보다는 여지껏 몰랐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참고로 나오기 전까지 쓰레기 봉투가 구마다 다르다는 것을 몰랐다. 서대문구와 마포구 경계에 있는 덕분에 서대문구 것을 사서 내놨다가 수거거부를 당한 적이 있을 정도다. 그러나 장담한다. 일상을 꾸려가는 것에서 나보다 모르는 사람 천지라고. 그러니 소중한 나의 친구들이여, 특히 여자 후배들이여 결혼할 마음이 있다면 자취인을 최우선으로 찾아보라. 그게 당신들의 고난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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