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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Aug 24. 2020

하루키 씨, 이제야 당신의 말을 이해했습니다

-오늘의 조언

전광훈 씨가 주최하는 광화문 집회를 본 적이 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공연을 보기 위해 나섰다 한가운데를 관통했다. 머리가 울릴 정도로 커다랗게 틀어놓은 확성기를 통해서는 말도 아니고 뭣도 아닌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광장에서만 노인들(‘어르신’이라는 점잖은 표현이 있지만 사용하고 싶지 않다)이 깃발을 흔든 것은 아니다. 공연장과 이어지는 지하 통로에도, 근처 가게에도 심지어 세종문화회관 내부에도 아무렇게나 퍼져 앉아 큰 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공연이 끝난 밤, 극장 입구 계단에서 노래방 기계를 틀어 놓고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기괴하기까지 했다.


그때의 내 마음을 정확하게 표현한 문장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언더그라운드]라는 책에 나와있다.


…나도 모르게 눈길을 돌리고 말았다. 그것은 내가 가장 보고 싶지 않은 것들 중의 하나였다. 주위 사람들도 나와 같은 표정을 지으며 신자들의 모습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한 태도로 그냥 스쳐 지나갔다.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은 엄청난 혐오감이며 이해의 범위를 훨씬 넘어선 음산함이었다. 그러나 그 혐오감이 도대체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 왜 그런 광경이 나에게 ‘가장 보고 싶지 않은 것들 중 하나’인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때는 깊이 생각해야 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그 광경을 재빨리 기억 속에서 지워 버렸다……


[언더그라운드]는 도쿄 사린가스 테러가 일어난 후 피해자들을 인터뷰해서 쓴 책이다. 1995년 3월 20일 월요일 오전 8시경, 도쿄의 5개 노선 지하철 객차 안에 ‘사린가스’가 살포되었다. 범인들은 옴진리교라는 종교집단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비닐에 든 액체 상태의 사린을 우산 끝으로 찔러 터트려 기화시키는 방법으로 테러를 저질렀다. 승객과 승무원 등 십여 명이 사망하고 삼천 명 이상이 다쳤다(책에는 3600명 정도라고 말하는데, 이 글을 쓰면서 기사를 검색해보니 6500명 정도라고 나와 있네요).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들 중 60여 명을 인터뷰했다. 책은 ‘죄와 벌’에 버금갈 만큼 두껍다.


하루키는 테러의 피해자들에 집중한다. 바쁜 월요일 아침, 늘 그렇듯 바쁘게 혹은 ‘아, 오늘 하루쯤은 쉬고 싶다’ 거나 ‘자고 싶다’ 같은 소박한 희망을 중얼거리며 지하철에 올랐던 ‘평범한’ 사람들이 무차별적으로 피해를 당했다. 쓰러지고 피를 흘리는 동안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정확히 알아챈 사람은 없다. 사망자들은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갔다. 배경이 밝혀지고 사건의 윤곽이 드러난 것은 한참이 지난 후다. 피해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 당하고, 신체적 정신적 후유증을 얻었다.



광화문 집회 보도가 나온 후 떠오른 것이 이 책이었다. 집회 참석자들이 사린 가스를 살포하거나 탄저균이 든 소포를 국민 개개인에게 배송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염병이 걸렸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검사도 받지 못하게 하고, 위치 추적도 불가능하게 만들어 광장에 풀어놓은 것은 테러와 크게 다르지 않다. 확진된 사실을 알고서도 병원에서 도망쳐 활보하는 모습은 순수한 의미에서의 테러다.


그들은 코로나로 인해 조심하며 살금살금 걸어가던 평범한 사람들의 얼음판 같은 삶을 쇠망치로 내리쳤다. 형식상 우산 끝으로 사린이 들어 있는 봉지를 터트리지 않았다고 해서 테러가 아니었다는 말은 한가한 소리다. 벌써 전국적으로 피해자가 넘쳐난다.


매일 집계되는 ‘확진자 000명’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그러나 친구가 병에 걸리고, 동네 사람이 전염되고, 회사가 통제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공포는 이제 손에 잡히는 무언가가 된다. 흉측한 괴물이 바로 내 앞에 입을 벌리고 있다는 통렬한 자각이 생긴다. 통계상의 숫자에 불과한 피해자들에게 일상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줄 필요가 생기는 이유다. 그들도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즉 나도 언제든 그들과 같이 피해를 당할 수 있다. 이런 마음을 갖지 않고서는 다음번, 그 다음번에 일어날 테러를 막을 수가 없다. 소설가인 하루키는 이 부분을 정확하게 이해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이제 그 육성에 잠시 귀 기울여주시기 바란다.
아니, 그에 앞서 상상해보시기 바란다.
때는 1995년 3월 20일, 월요일. 활짝 갠 초봄의 아침. 아직도 바람은 차가워 오가는 행인들은 모두 코트를 입고 있다. 어제는 일요일, 내일은 춘분 휴일. 즉 연휴의 한가운데다. 어떤 사람은 '오늘은 그냥 쉬고 싶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사정상 당신은 쉴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신은 여느 때처럼 아침에 눈을 뜨고 세수를 한 다음, 아침을 먹고 양복을 입고 역으로 간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붐비는 전차를 타고 회사로 향한다. 여느 때와 조금도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딱히 다른 날과 구분할 필요도 없는 당신의 인생 속의 하루에 지나지 않았다.
변장한 다섯 명의 남자가 그라인더로 뾰족하게 간 우산 끝으로 묘한 액체가 든 비닐봉지를 콕 쑤시기 전까지는......


20년 전 이 책을 읽을 때 나는 하루키가 느꼈을 공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살아있는 사람을 인터뷰한 책이니 말에도 행간에도 그들의 삶이 묻어 있다. 타인의 삶이란 어떤 의미로든 흥미진진하다. 그런 의미로 책은 재미있다. ‘그래, 일본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군. 잘못된 종교란 무서운 것이야’ 정도가 내 감상의 전부였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완전히 다르다.


하루키는 “1995년 3월 20일 아침에, 도쿄의 지하철에서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에 관한 의문으로 책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제 나도 궁금하다. “2020년 8월 15일 광화문 광장에서는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누군가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20년도 전에 말했다. 나는 그의 의중을 이제야 제대로 이해한다.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 들어서야....쯔쯔쯔....이래서 내가 제일 걱정이다.


오늘의 조언 : 아, 마스크. 덥고 힘들지만 마스크 잘 착용합시다. ㅠ.ㅠ


첨언: 도쿄 지하철 테러 사건에 관련된 옴진리교 관계자들은 사형당했습니다. 아니, 뭐 사실이 그렇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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