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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Dec 28. 2020

정치를 외면한 대가

- 오늘의 조언

여덟아홉 살 즈음, 우리 가족이 남의 집 문간방 두 개에 세 들어 살 때 이야기다. 손바닥만 한 방 다섯 개가 있는 집에 세 가족이 살았다. 주인집은 본채의 넓은 방 두 개와 부엌을 사용했다.      


어느 봄, 본채 옆 작은 방에 아들 하나를 둔 가족이 이사를 왔다. 밥은 마당에 작은 풍로를 놓고 해결했다(우리 집 부엌은 대문에서 집 사이 한 뼘쯤 되는 통로였다). 무릇 당시의 평범한 골목이란 동네 아이들이 다 함께 뛰어다니고, 생각나는 집에 들어가서 밥을 얻어먹고, 아무 어른에게나 야단을 맞는 그런 곳이었다. 어느 집에 숟가락이 하나인지 두 개인지 정도는 눈감고도 알 수 있었다.      




새로 이사 온 아저씨의 직업은 이발사였다. 시내 유명한 호텔 이발소에서 일했다. 근엄한 표정의 아저씨는 동네의 어떤 남자보다도 각 잡힌 양복을 입고 출퇴근했다. 호텔의 이발소에 오는 손님들은 지체 높고 훌륭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신도 손님들에게 어울리는 복장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 해 여름, 마당에 의자를 놓고 주인 할아버지의 머리를 손질해 주었다. 수염을 정리하기 위해 잔 거품이 담긴 액체를 양동이 가득 만든 후 얼굴에 촘촘히 발랐다. 손질한 칼을 막 가져갔을 때 애국가가 시작되었다.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애국가는 울려 퍼졌다. 애국가가 들릴 때면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해야 했다. 길을 걷다가도 예외는 없었다. 극장에서 영화를 시작하기 전에도 어김없이 애국가는 울렸고, ‘동해물과 백두산’과 더불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라며 자리에 앉아야 했다.    

  

이발사는 애국가가 끝날 때까지 가슴에 손을 올린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왜 면도가 멈춘 것인지 확인하려고 몸을 움직였다 눈에 거품이 들어간 할아버지 옆에서, 이발사의 아들이 뛰어다니다 양동이 가득한 비누 거품을 걷어찼다. 여름 저녁 비누 거품들이 바닥에서 몽글몽글 솟아올랐다. 할아버지는 소리를 지르고, 아들은 맨 손으로 물방울을 튕겨대는데 아저씨는 노래가 끝날 때까지 움직일 줄 몰랐다. 지금껏 그 저녁은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그 가족이 사라진 것은 여름이 끝나기 전이었다. 작은 방이라 짐도 소박했기 때문인지 온다 간다는 말도 없이 사라졌다. 며칠 후 처음 보는 사람들이 무서운 얼굴을 하고 몰려왔다. 정리하자면 아저씨는 동네 사람들을 포함한 여러 명에게 사기를 쳤던 것 같다. 이발소를 찾는 누군가에게 줄을 댈 수 있다거나 뭐 그런 거였겠지. 주인 할아버지도 피해자였다. 시끄럽던 문 앞이 조용해지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문간방에 살면 이럴 때 서럽다).   

   

당시를 떠올려본다. 그때는 군복을 입고 대통령이 되었던 사람이 다음번에는 양복을 입고 대통령이 되던 시절이다. 하루 두 번 애국가가 울렸고, 외국에서 손님이 올 때면 근방 학생들은 모두 길로 나가(내가 그 당사자다) 종이 태극기를 흔들었다(학습권 같은 것은 개나 줬겠지). 고위층을 알고 있다는 이발사에게 줄을 서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어처구니가 없다.      




한없이 옛날 같지만 실은 그리 오래 전도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직접 선거로 대통령을 뽑기 시작했을 때 나는 무려 고등학생이었다. 대통령이란 그저 양복 입은 사람들끼리 쑥덕거리며 뽑는 것이 자연의 법칙까지는 아니더라도 매우 정상적인 방법이라고 배웠고 알고 있었다(이른바 간접선거다. 대통령을 직접 뽑기 시작한 것은 1987년부터다).      


교육이란 어쩔 수없이 권력의 편이다. 당시에는 왜 선거를 하는지, 민주주의란 무엇인지, 사회란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어야 하는지는 학교에서 배울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을 배운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한참 후의 일이다. 나에게 정치란 “나이 먹은 어른 남자들이 자기들 이익만 챙기면서 국민들을 등쳐먹는 낡고 더러운 것”이었다(내 이미지와 정확히 일치하는 인물은 미드 ‘하우스 오브 카드’에 나오는 프랭크 언더우드다). 당연히 선거권이 생긴 후에도 투표는 하지 않았다. 다들 도둑처럼 보이는데 차악을 뽑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만큼 살고 보니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최악과 사는 것보다는 차악과 지내는 편이 낫다는 점이다. 못되게 굴면서 월급도 안 주는 회사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힘들지만 월급이라도 주는 회사가 낫다고 하면 어이없지만 좀 말이 될지 모르겠다. 다음번에는 이번보다 좀 나은 차악을 선택하면 된다. 월급이라도 받고 있어야 다음 회사로 옮길 수 있다. 단번에 좋아질 수는 없지만 희망이 생긴다. 역사는 그런 식으로 흘러왔다.      


그런 와중에도 잠깐 정신을 놓으면 언제나 최악이 돌아오곤 했다. 슬프지만 어쩔 수 없다. 먹고사는 것도 피곤한데 이런 것까지 신경을 써야 하느냐고? 물론이다. 정치는 먼 이야기 같지만(아악~ 프랭크!), 내가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파견 근로자에 관한 법률’만이라도 제대로 만들었다면 정규직, 비정규직 문제가 이렇게 심각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 정규직, 비정규직 문제는 사회적 합의 여부를 넘어 인간성의 영역에까지 심각하게 영향을 주고 있다. 어떻게든 손을 써야 한다.      




가까운 디스토피아를 다룬 영국 드라마 “이어즈&이어즈”에서 현명하지만 종종 뼈 때리는 말씀을 하시는 할머니가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모든 잘못된 일은 다 너희 탓이야. 왜냐하면 여기 있는 우리는 모두 앉아서 종일 남 탓을 해. 경제 탓을 하고 유럽 탓을 하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핑계를 대지. 우린 너무 무기력하고 작고 보잘것없었다고 말이야...... 난 모든 게 잘못되는 걸 봤다. 시작은 슈퍼마켓이었어. 계산대 여자들을 자동 계산대로 바꾼 게 시작이었지. 20년 전 처음 등장했을 때 거리 시위는 했니? 항의서는 썼어? 안 했지. 씨근덕대기만 하고 참고 살았어...... 우리가 이 지경으로 놔둔 거야. 실은 우리도 좋아해..... 거닐다가 장 볼 물건을 고르기만 하면 되거든. 계산대 여자와 눈 마주칠 일 없지. 우리보다 적게 버는 여자 말이야. 우리가 없애고 쫓아낸 거야. 그러니까 우리 탓 맞아. 우리가 만든 세상이야. 축하한다, 다들 건배하자.”        


이번에도 할머니의 말은 아프다. 하지만 새겨 들어야 한다. 정치를 놔두면, ‘그들만의 정치’로 버려두면 망가지는 것은 내 삶이다. 내 삶이 가장 가볍고 무기력하기 때문이다. 권력을 쥔 자들은 정보도 함께 틀어쥐고 있다. 어느 쪽이 차악인지를 알기 위해서도 신경을 세우고 뉴스를 짚어가야 한다. 피곤하기 이를 데가 없지만, 선택의 여지도 없다.      


그러니 드라마 보는 시간을 조금 쪼개서라도 뉴스를 살펴봐야 할 때다.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플라톤은 “정치를 외면한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에게 지배당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힘이 없지 질이 낮은 사람은 아니지 않나? 그러니 조금씩 신경을 쓰자. 지금부터라도 말이다.      


-오늘의 조언 : 그들이 맘대로 하게 내버려 두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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