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 레이디

- 달콤한 말은 두 번 생각할 것

by 지안

제일 처음 안 칵테일 이름이 [핑크 레이디]였습니다. 초등학생 시절, 세 들어 살던(제가 세를 든 것은 아니고, 부모님이 세를 든 것이긴 합니다만) 집에는 대학원생 언니가 살았습니다. 마음 좋은 분이라 저와 놀아 준 적도 많았는데, 어느 날 이 이름을 알려주었습니다.


아마 언니는 소개팅이나 미팅을 했던 것 같습니다. 남자분과 칵테일을 마시러 갔던 거겠죠. 그때 [핑크 레이디]를 마셨던 겁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언니는 남자분에게 마음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 그렇게 반짝이는 눈으로 색깔과 향기와 기타 등등을 전해주었는데, 안타깝게 잘 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음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없으니까요. 덕분에 저에게 [핑크 레이디]라는 단어는 ‘첫 만남’, ‘소개팅’, ‘두근두근’ 같은 것과 비슷한 의미로 기억되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 소개팅을 했다는 후배와 이야기를 나누다 바에 갔었다는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묻고 말았습니다.


“혹시 핑크 레이디?”


후배는 코로나보다 더 속상한 소식을 들었다는 표정으로 정색을 하며 대답하더군요.


“뭐예요, 그게? 엄청 촌스럽잖아요.”


그렇습니다. 이제 ‘핑크 레이디’라는 이름은 ‘촌스러움’의 대명사가 된 것입니다. 아마 ‘레이디’라는 단어가 주는 고루한 분위기 때문이었겠죠? 그나저나 세월이 참…..




[핑크 레이디 Pink lady]라는 칵테일 이름은 동명의 뮤지컬 제목에서 유래했습니다. 헤이즐 던(Hazel Dawn)과 윌리엄 엘리엇(William Elliott)이 주연을 맡았던 [핑크 레이디]라는 뮤지컬이 1911년 뉴욕의 뉴암스테르담 극장에서 공연을 시작합니다. 헤이즐 던은 이 작품에서 노래뿐 아니라 바이올린 연주까지 선보이며 큰 인기를 얻게 되었는데 그녀의 별명이 아예 [핑크 레이디]로 붙여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뉴욕 브로드웨이의 엄청난 성공에 힘입어 런던의 무대까지 진출하게 됩니다. 1912년 런던 공연의 개막 파티 때 여주인공 헤이즐 던을 위해 특별히 헌정된 칵테일이 [핑크 레이디]였습니다.


이 뮤지컬은 결혼을 앞둔 신사(Gentleman)와 숙녀(Lady)가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이르는 과정을 다룬 소동극입니다. 신사와 숙녀라니, 제 후배의 말처럼 좀 촌스럽게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Ladies And Gentlemen"이라는 말은 사용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레이디’와 ‘젠틀맨’들은 과연 그렇게 촌스러운 사람들이었을까요?




레이디(Lady)와 댓구를 이루는 단어는 사실 ‘영주(Load)’입니다. Load의 어원은 흘라프베아르드(Hlafweard)입니다. 홀라프(Hlaf)는 빵, ‘베아르드(weard)’가 ‘지키는 사람’이라는 뜻이니, '빵을 지키는 사람'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무엇으로 빵을 만들었을까요? 영주님들이 직접 밭을 갈았을 리는 없습니다. 평민(농노라고 부를 수도 있겠군요)들이 힘겹게 농사 지어 수확한 밀을 영주(Load)에게 바쳤습니다. 당시 평민들이 영주 및 교회에 납부해야 하는 세금이 50-70% 달했다고 하니 수확물의 대부분은 영주님 창고로 들어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레이디(lady)의 어원은 흘라프디게(Hlafdige)라고 합니다. 홀라프(Hlaf)는 빵, 디게(Dige)는 '여자'를 의미합니다. 즉 레이디는 "빵 만드는 여자"를 말합니다. 영주가 거둬드린 곡식으로 빵을 만드는 사람이 레이디(Lady)였던 겁니다. 그래야 영주님이 식사를 하실 수 있었겠지요.


봉건제가 붕괴되고 중앙집권적인 왕정국가로 변하면서 영주(Load)라는 말은 점차 사용 빈도가 떨어집니다. 대신 레이디(Lady)라는 말은 살아남습니다. 신사(Gentleman)이라는 단어와 짝을 이루면서 말입니다. 단어는 살아 남았지만, 살아있는 여자 중에 ‘레이디’라는 호칭을 받을 수 있는 수치는 매우 낮았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신사(Gentleman)는 레이디보다 후대에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Gentleman은 ‘Gene’에서 파생된 말인데, 이는 고대 그리스어 ‘Genos’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즉 ‘잘 태어난’ 다시 말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이라는 뜻입니다. 젠틀맨들은 봉건 시대보다 한참 후대에 나타납니다. 16세기 이후, 귀족 계급과는 별개로 대농장 소유나 법률가, 사업가 등의 전문적인 직업을 가짐으로써 부자가 된 사람들을 일컫는 개념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이름 대면 알 만한 기업을 소유했거나, 퇴직금으로 50억 정도를 챙겨주는 회사에 취업시켜 주는 아버님을 둔 계층입니다.


젠틀맨이란 말이 만들어질 당시에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은 마음 씀씀이도 넓고, 평민들은 쫌스럽다고 생각해서 ‘인심이 후한, 관대한’이란 뜻의 Generous라는 단어도 파생됩니다. 요즘에도 “있는 집 애들이 성격도 좋다”는 말이 있으니, 비슷한 뜻이라고 생각하면 쉽습니다.


그러니 어느 대중 연설에서 누군가가 “Ladies And Gentlemen"이란 호칭으로 저를 불렀다고 마음 설레면 곤란하다는 말입니다.




중세 유럽 귀족의 비율은 국가와 시기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전체 인구의 1-2%를 넘지 않았을 것으로 봅니다. 조선 초기 양반의 비율도 비슷했습니다. 그러니까 엄격하게 말하자면 “레이디스 앤 젠틀맨’이라는 호칭은 상위 1-2%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생활했을까요? 노동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필요한 것은 세금으로 거둬들이거나 적당한 회사에 몇 년 다닌 후 퇴직금을 수령하면 되니까요.


그들이 필요한 것을 벌어야 하는 사람들은 ‘레이디스 앤 젠틀맨’이라는 호칭을 듣지 못하는 98-99%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레이디와 젠틀맨들은 나머지 98-99%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영국의 종교학자인 카렌 암스트롱(Karen Armstrong)이 쓴 책 [신의 전쟁]에 그 답이 있습니다.


서기 15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중동, 동남아시아, 북아프리카, 유럽에 농경 문명이 자리를 잡게 되어, 모든 곳에서 귀족은 농민을 착취했다. 지배계급의 강압이 없었다면 농민이 경제 잉여를 생산하도록 강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인구 성장이 생산성 발전과 발을 맞추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귀족은 대중을 최저 생활 수준에서 살도록 강제함으로써 인구 성장을 억제하며 인간의 진보를 가능하게 했다……. 농경 사회 지배자들은 국가를 자신의 사적 소유물로 여겼으며 자신의 부를 위해 국가를 마음대로 착취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역사에는 그들이 농민에게 어떤 책임감을 느꼈다고 암시하는 기록이 없다……


뮤지컬 [핑크 레이디]는 기대와 달리 영국에서 크게 실패합니다. 미국으로 돌아와 공연을 계속 하지만 내리막 길을 걷다 결국 사라집니다. “귀족”계급이 사라진 것처럼 말입니다. 대신 이 칵테일 [핑크 레이디]는 살아남습니다. 1912년 만들어진 이 칵테일은 금주법 시대를 거치며 엄청난 인기를 얻습니다. ‘젠틀맨’처럼 말입니다. 분홍빛은 알코올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감추기에 알맞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술’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습니다. 귀족이던 젠틀맨이던 98-99% 위에서 군림하려고 든다는 사실처럼 말입니다.


금주법이 끝난 1934년, 미국의 한 잡지는 핑크 레이디를 “최악의 10가지 음료” 중 하나로 선정해 발표합니다. 뭐 촌스러워서 그랬을까요? 하하


선거의 시기가 시작된 것 같습니다. 말과 말들이 돌아다닙니다. 우리를 기꺼이 “Ladies And Gentlemen”으로 부르는 목소리도 많습니다. 그런 호칭을 던져주고 자신들만 퇴직금을 50억 원씩 수령하려는 심보지요. 이제 그런 일은 지긋지긋합니다. 그냥 ‘당신들’이라고 불러도 좋으니 퇴직금, 월급, 휴가 이런 것 좀 제대로 주기 바랍니다. 달콤한 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핑크 레이디]를 마시면서 촌스럽게 다짐하고 또 다짐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만들어 보겠습니다.


1. 플라스틱 통에 얼음을 넣어주세요


2. 진 1 소주잔, 우유 1 소주잔, 계란 흰자 1개분, 그레나딘 시럽 1 밥숟가락 넣습니다


3. 엄청 많이 흔들어 줍니다. 계란 흰자가 완전히 섞일 때까지요.


4. 적당한 잔에 따르고 다짐과 함께 즐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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