럼맥

-야구와 함께

by 지안

11:0으로 이기고 있던 시합. 상대에게 한 점, 두 점 추격을 당하기 시작합니다. 점수는 순식간에 11:11. 더그아웃의 사기는 떨어지고 선수들은 짜증을 내기 시작합니다. 어수선한 가운데 감독이 의외의 이름을 부릅니다. 지명당한 선수는 재킷을 벗고 타석으로 뛰어나갑니다. 그의 특기는 볼 넷으로 진루하기. 해설자들은 감독의 작전이 무엇일지 여러 가지 예측을 내놓습니다. 볼을 지켜보던 타자가 배트를 휘두릅니다. 멀리 사라지는 공.


락커 룸의 티브이조차 차마 바라보지 못하던 단장은 비로소 20연승의 기쁨을 온몸으로 느끼며 말합니다.


“야구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어.
이런 승리는 팬들을 즐겁게 하지.
티켓과 핫도그도 왕창 팔리고……
다른 의미는 없어.”


2011년 영화 [머니볼]의 한 장면입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야구가 나라를 구하거나 인류의 미래를 만들지는 않습니다. 사실 팬들에게 기쁨을 준다는 점을 제외하면, 달밤의 공놀이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팬들의 입장에서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대상, 그 자체 입니다. 빌리 빈의 말처럼 말입니다.




브레드 피트는 이 영화에서 메이저리그 최하위 <오클랜드 에슬레틱스> 팀의 단장 ‘빌리 빈’ 역할로 나옵니다.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했다고 하는데, 설마 이처럼 멋지고 잘생긴 데다 자존감 넘치는 사람이 실존할 리가 없습니다. 많이 각색되었겠죠. 10프로쯤 비슷할까요? 20프로쯤? 그냥 그렇게 생각하겠습니다.


<오클랜드 에슬레틱스>는 가난한 팀입니다. 친절하게도 영화는 초반, 자막으로 구단 운영 금액을 알려줍니다. 4천 달러 정도입니다. 당시 뉴욕 양키즈의 구단 운영 금액이 1억 2천만 달러 정도라는 비교 수치와 함께 말입니다. 1/3 수준입니다.


이런 상황이니 선수를 키워 놓으면 다른 구단에서 좋은 금액을 제시해 데려가 버립니다. 다른 구단의 선수를 모셔올 생각은 꿈도 꿀 수 없습니다. 어렵게 키워 놓은 선수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다 못해 1루수 없이 시즌을 시작해야 할 비상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팀의 스카우터들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습니다. 자기들만의 직관과 경험을 따르라고 야단입니다. 이래서야 배가 산으로 갈 일만 남은 것 같습니다.




바로 그때, 빌리는 예일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피터’를 만납니다. 그리고 야구를 전혀 다른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피터는 말합니다. 이기고 싶다면 ‘선수를 사는 것이 아니라 승리를 사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구란 주루를 돌아 홈으로 더 많은 선수가 들어온 팀이 이기는 경기입니다. 점수를 낼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타자는 공에 맞아도, 4 볼을 골라내도 1루에 갈 수 있습니다. 누군가 100%의 확률로 4 볼을 골라낼 수 있다면, 굳이 50%의 확률로 안타를 칠 필요는 없다는 이상한 결론이 생깁니다. 누군가는 “야구는 그런 것이 아니다”라고 화를 낼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외치는 사람들에게 빌리는 묻습니다. 그러면 야구는 무엇이냐고,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만약 팀이 시리즈 마지막 경기에 패하면 유령 취급하면서 언제 봤냐는 식으로 얼굴을 바꾸지 않느냐고, 그러니 어떤 수를 쓰더라도 이겨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빌리 빈의 원칙은 ‘승리’입니다. 그는 자신의 원칙을 위해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자신의 방법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그대로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그는 말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결국 실패한다면 그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현실에서 이런 경우 대부분 실패하지만 영화에서는 성공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영화입니다!


한국시리즈가 한창입니다. 어쩌다 입동이 지난 이 시점까지 야구를 보게 되었을까요. COVID 19 은 2년째 진행 중인 감염병입니다. 프로야구에도 감염된 선수가 발생했을 때의 조치들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리그 중단’은 그 조치들 중 가장 가능성이 떨어지는 것 중 하나였습니다.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기로 하겠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도대체 ‘원칙’이 무엇이었냐는 것이었겠지만 누구 하나 속 시원하게 말해주지 않을 것 같습니다. 현실에서 이런 경우 원칙이 지켜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말로 갈음하고 싶을 뿐입니다.





영화 속에서 빌리는 계속 뭔가를 씹고 있습니다. 전직 야구 선수 출신인 빌리는 땅콩을 씹거나 해바라기 씨를 뱉거나 커피를 홀짝입니다. 결승에서 패배한 후 집에서 맥주를 마실 때 전화를 받습니다. 역시 야구라면 맥주입니다. 빌리 빈은 <오클랜드 에슬레틱스> 홈구장과 비교도 안 되는 멋진 구장으로 초대를 받고, 그곳에서 스카우트 제안을 받습니다. 그는 스카우트 제안을 받아들였을까요? 아니면 오클랜드 팀에 남았을까요?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가 진행된 잠실과 대구 구장은 그야말로 오랜만에 관중 입장과 음식 취식이 가능해서 흥겨운 분위기가 났습니다. 이것은 치킨인가 너겟인가 싶은 치킨 박스에 담긴 무엇과 어묵과 맥주를 2년 만에 만나보니 무척 반가웠습니다. 추위로 붉어진 코와 연신 호호 입김을 불어 대며 수비하는 선수들이 안타깝긴 했지만 어쩌겠습니까.


하지만 낮은 기온 탓에 고척 돔으로 옮긴 한국 시리즈는 관중 입장은 가능하지만 취식은 안됩니다. 실내라 그렇다고 합니다. 그러니 나머지 시리즈는 티브이 앞에서 치맥을 즐기며 관전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오늘은 럼맥을 주조해 보겠습니다. 소맥이나 럼맥이나 방법은 같습니다. 원칙 없는 일에는 섞어 마시는 술이 최고니까요.


1. 맥주잔에 럼을 2/3 소주잔 부어주세요

2. 나머지를 맥주로 채워주세요

3. 야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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