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즈베리 스피릿쳐

- 연말의 시간을 소중하게

by 지안

2021년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해마다 이맘때는 크리스마스와 연말, 파티와 모임들로 분주했을 시간입니다. 회사 연말 회식부터 가족 혹은 친구들끼리 모이는 조촐한 송년회까지 약속 장소에 얼굴을 내밀다 보면 12월 한 달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사라집니다.


정신없이 연말을 불태우다 어느덧 정신을 차려보면 보신각 타종식에 참석한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티브이 화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저를 발견하게 됩니다.


'부지런한 사람들이 저렇게나 많다니..... '


고달프고 험난했던 한 해의 넋두리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제게 일어난 모든 불행한 일은 다 게으른 제 탓입니다.


그리고 몇 시간 후에는 해돋이로 유명한 곳마다 모여있는 엄청난 인파에 놀라 입이 떡 벌어집니다. 아, 새 해에도 전 틀렸습니다. 저렇게나 부지런하고 열심히 사는 분들이 많은데 행운이 저에게까지 기회를 주겠냐는 말입니다.




장엄하게 떠오르는 해 앞에서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을 보다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이 지나갑니다.

'12월 31일의 해와 1월 1일의 해가 다를 것이 뭐야!'

네, 질투심으로 삐뚤어진 인간이 할 만한 생각이라는 것, 저도 압니다. ㅎㅎ


하지만 문득 궁금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언제부터 1년을 정하고, 새해를 기념하며 살았을까요? 인간이 만들어진 이래 항상 그랬을 것 같지만, 놀랍게도 이런 식으로 해를 구분하기 시작한 것은 겨우 500년쯤 전입니다. 지금 우리가 쓰는 달력은 1582년 그레고리우스 13세가 발표한 '그레고리우스력'이기 때문입니다.




1582년 2월 24일 그레고리우스 13세는 칙서 하나를 발표합니다. 이전까지 사용된 '율리우스력'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새로운 달력인 '그레고리우스력'을 반포하는 내용입니다.


율리우스력은 그 이름도 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기원전 45년에 만들어졌습니다. 1년을 365.25일로 계산하여 만든 정확한 달력이었는데, 문제는 지구가 태양을 365.2422일 만에 도는 바람에 발생하게 된 0.0078일 때문에 생깁니다. 1년에 674초씩 차이가 날 뿐이지만 그 작은 차이가 1500년이 넘게 쌓이다 보니 무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었습니다.


농사를 짓는 분들은 도시인들보다 '절기'에 예민합니다. 특히 봄의 시작을 알리는 '춘분'은 중요한 날입니다. '춘분'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날로, 예전에는 무당이나 제사장 같은 이들이 특정 지점에 막대 같은 것을 꼽고 그 그림자의 길이로 절기를 짐작했다고 합니다. 춘분이 중요한 이유는 이 날을 기점으로 식물들의 파종 시기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고추 파종일', '파 심는 날'처럼 특정 작물을 심기 좋은 시기가 작은 글씨로 표시된 달력을 관련 기관에서 만들어 배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역마다 기후며 강수의 차이가 나서 처음 귀농하는 분들은 근처 농부님들께 하나하나 여쭤봐 가며 작물을 심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수확을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농부님들은 '응, 바람이 이쪽에서 부니까' 고추를 심고, '날씨가 이만저만하니' 감자를 심으라고 알려주십니다. 그야말로 몸으로 절기를 터득하고 있는 것이죠.




그레고리우스력이 반포될 때쯤은 실제 춘분과 달력상 날짜 사이에 11일의 차이가 생깁니다. 로마 사람들은 우리네 농부님들처럼 달력에 신경 쓰지 않고 계절의 흐름에 맞게 실제 춘분을 기점으로 농사를 지었을 겁니다. 그러다 갑자기 궁금해졌을 겁니다.


"춘분이 지나고 보름달이 떴는데 왜 주일에 성당에서는 부활절 예배를 드리지 않는 거지?"


그렇습니다. 부활절은 가톨릭의 가장 중요한 행사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달력에 적힌 춘분을 기점으로 날짜를 정했습니다. 그 결과 1500년 전에 비해 부활절이 11일이나 늦어지게 되었고, 교황으로서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레고리우스 13세의 칙령 중에는 눈에 확 띄는 내용이 있습니다.

[계절과 달력을 일치하기 위해 10일을 없앤다. 1582년 10월 4일 목요일 다음 날은 10월 15일 금요일이 된다]고 말이죠.


그러니까 누군가 '난 1582년 10월 5일에 태어났다고.'같은 소리를 한다면, 바로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레고리우스력은 가톨릭을 국교로 하는 나라를 중심으로 빠르게 퍼져나갑니다. 하지만 그 외 나라에는 무리였죠. 갑자기 10월 5일 - 14일까지를 없애라는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독일처럼 개신교도가 많은 나라에서는 1697년 정도가 되어야 그레고리력을 받아들입니다. 100년 정도 늦게 받아들인 것은 애교입니다. 이집트는 1875년이 되어야, 러시아는 1917년이 되어야 사용하게 됩니다.


1917년 10월 25일 블라디미르 레닌의 볼셰비키들이 권력을 잡은 10월 혁명은 율리우스력을 쓰던 시기에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10월 혁명'이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레닌은 권력을 잡은 후 재빨리 그레고리력을 받아들입니다. 다른 날짜 체계를 사용하는 것은 외교에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상대 국가와 모월 모일에 대표 회의를 하기로 약속해 놓고 서로 다른 날 회담장에 나타나면 퍽 곤란해지니 말입니다. 이 즈음이 되면 러시아에서 사용하던 율리우스력과 그레고리력 사이에 무려 13일이나 차이가 나게 됩니다. 덕분에 그레고리력으로 바뀐 이후 러시아 10월 혁명 기념일은 11월 7일이 됩니다. 11월에 열리는 10월 기념일. 난감하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그 외에 특이한 체계도 있습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직후 만들어진 '공화력'입니다. 혁명에 성공한 후 혁명가들은 미터법을 제정하는 한편 달력에도 손을 댑니다. 미터법은 10진법인데 왜 시계는 24시간에 60진법을 사용하고, 일주일은 7일인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 24시간을 10시간으로, 매 시간을 100분으로 나누고, 일주일도 10일로 조정합니다. 딱 봐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떠나 10일에 한 번 쉬다니 도대체 말이 됩니까? 주 9일제라니요..... 하지만 괜히 싫은 표정을 지었다가 길로틴 아래에 목을 넣게 될 수도 있습니다. 불만이 있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공화력은 1793년 10월부터 사용되다 나폴레옹이 등장한 1806년 1월에 폐지되고 프랑스는 그레고리력으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1년이란 그러니까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시간을 인간이 적당히 정해놓은 체계입니다. 대단하다면 대단하고 아니라면 아닌 것이 1년입니다. 기술이 발전해서 우주에서 살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정말 1년도, 한 해의 마무리도, 송년회도 완전히 다른 의미가 될 테지요.


그런 날이 오면 시간은 어떤 의미가 될까요?




제가 사랑하는 영화 [아비정전]의 첫 장면은 이렇습니다.


낯선 남자인 아비가 수리진에게 작업을 걸면서 "내 시계를 좀 봐."라고 말합니다. 싫다고 말하던 여자는 1분이면 된다는 말에 '그 정도야 뭐'하는 마음으로 남자의 시계를 바라봅니다. 1분이 지난 후 그가 말합니다.


1960년 4월 16일 3시 1분 전. 당신과 여기 함께 있었고, 당신 덕분에 난 항상 이 순간을 기억하겠군. 이제부터 우리는 친구야. 이건 당신이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지. 이미 흘러간 과거니까.


그의 말처럼 여자는 그 1분을 영원히 기억합니다.




전염병으로 송년회든 연말이든 모든 인간의 행사는 멈췄지만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 2022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올해는 어쩔 수 없이 각자의 공간에서 혼자 혹은 방역 수칙에 맞는 인원수만 모여 한 해의 마무리와 새로운 계획을 떠올릴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시간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수리진이 그 1분을 영원히 잊을 수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은 각자의 송년회에 어울릴 칵테일을 만들어보겠습니다. 알코올을 드시는 분도 그렇지 않은 분도 즐기실 수 있습니다.


스프릿처(Spritzer)는 독일어 Spritzen에서 파생됐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 여름에 즐겨 마시는 칵테일이라고 합니다. 매년 8월에 잘츠부르크에서 열리는 모차르트 음악제에서는 이 칵테일이 제공된다고 합니다만 저는 참석을 못 해봐서......


오늘은 아무래도 연말 느낌을 위해 특별히 '라즈베리 스피릿처'를 만들겠습니다. 재료는 냉장고에서 갓 꺼낸 차가운 상태로 준비해주세요.


1. 적당한 그릇에 라즈베리와 설탕을 1 :1로 넣어주세요. 저는 냉동 라즈베리를 녹여서 사용했습니다. 그다음 사정없이 으깨주세요


2. 잔을 준비하시고 으깬 라즈베리를 1 밥숟가락 넣어주세요


3. 화이트 와인을 1 소주잔 부어주세요. 알코올이 싫으신 분은 이 단계는 건너뛰세요.


4. 소다수로 나머지를 채워줍니다.


5. 아름다운 라즈베리 스피릿처를 즐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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