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빌로프 어페어

- 사과와 함께하는 시간

by 지안

사과의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홍옥’의 계절은 이미 끝났지만 달콤하고 아삭한 다른 품종의 사과와 겨울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눈치 채셨겠지만 같은 ‘과일’에도 여러 품종이 있고 그에 따라 맛도 다릅니다. 인간이 재배하는 농산물의 근원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와, 이렇게 생긴 조상에서 이런 후손이 나왔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모양이 바뀐 경우를 흔하게 만납니다. 야생의 열매가 개량을 통해 다른 품종이 되고, 그것들을 교배하고, 당도나 성분을 강화하는 과정을 통해 맛있거나, 수확량이 많거나. 병충해에 강한 품종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단순한 사과 한 알에도 심오한 유전학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카자흐스탄의 옛 주도 ‘알마티’는 ‘사과의 머리’라는 뜻인 러시아식 표현 ‘알마티아’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이름만 그런 것이 아니라 과학적으로도 처음 식용 사과가 재배된 곳, 사과의 고향으로 불립니다. 이 사실을 밝혀낸 사람이 20세기 초반 러시아의 식물학자 니콜라이 바빌로프(Nikolai Vavilov)입니다. 바빌로프는 야생 사과나무의 조상을 보존하는데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람입니다. 사과뿐 아니라 밀, 옥수수, 기타 곡물 등 중요한 작물의 지리적 기원과 유전적 관련을 연구했으며, 수 십만 개의 씨앗을 채취하여 종자은행을 설립합니다.


사진의 색을 수정하거나 화질을 개선하여 마음에 드는 그림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반복하여 사용하고 싶다면 반드시 원본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로 농산물이나 작물을 영구적으로 이용하고 싶다면 종자의 원형을 보존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바빌로프 이전의 누구도 그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니콜라이 바빌로프(Nikolay Vavilov)는 1887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유한 상인 가정에서 출생했지만 그가 살던 동네에는 형편이 좋지 않은 농부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는 가난과 반복되는 농작물 실패, 기근을 끝장내고 싶다는 마음으로 농업을 전공합니다. 모스크바 국립 농업 대학을 졸업한 그는 러시아뿐 아니라 5 대륙을 직접 탐사하며 식물 및 종자를 채취합니다. 그 일을 위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는 물론 15개 언어를 배웠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를 방문한 기록도 있습니다.


그가 활동하던 당시는 멘델의 유전법칙이 막 재발견되던 시점이었습니다. 농작물의 교배는 전적으로 농부들의 경험에 의존했을 뿐 과학의 영역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농업을 근본적으로 다른 시각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점을 깨닫습니다. 1924년 레닌그라드에 ‘바빌로프 식물산업연구소’를 설립합니다. 세계 최초의 종자은행입니다. 바빌로프는 그곳에 자신이 수집한 종자들을 모으는 한편, 국제 유전학 회의 등을 개최하기도 합니다.




1930년대 말 스탈린의 총애를 받으며 ‘트로핌 리젠코’라는 생물학자가 새롭게 부상합니다. 그는 “획득 형질 유전”을 주장했습니다. 유전학도 믿지 않았습니다. 바빌로프는 리젠코의 생각이 소비에트 농업에 커다란 문제가 될 수 있다며 공개적으로 비판합니다. 문제는 절대 권력이던 스탈린의 마음이 리젠코에게 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1941년 바빌로프는 간첩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습니다. 과학자들의 탄원이 이어지자 1942년 20년 형으로 감형이 됐고, 수형소에서도 죄수들을 상대로 유전학을 가르쳤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1943년 질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공식문서에는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 사망 원인은 ‘아사’였습니다. 바빌로프는 1955년 흐루시초프 때 복권됩니다.




그렇다면 레닌그라드의 ‘바빌로프 식물산업연구소’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1941년 9월부터 1944년 1월 사이 레닌그라드는 ‘섬’이 됩니다. ‘레닌그라드 공방전’ 이야기입니다.


2차 세계대전 중 히틀러는 레닌그라드를 포위한 채 전투를 벌입니다. “굶주림으로 숨통을 끊고 지구 상에서 흔적을 없애 버려라.”라는 말을 진짜 히틀러가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전해지기는 합니다. 잔인하기 짝이 없는 말입니다.


그 시기 레닌그라드는 독일군의 포위로 보급로가 완전히 끊겨서 먹을 것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땔감, 의약품 등등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을 찾는 일이 쉬울 정도였습니다. 1941년 9월 이전, 그러니까 전쟁의 분위기가 한창 감돌 때 스탈린은 미술관의 예술품까지 후방으로 철수시켰지만 종자은행의 샘플들은 내버려 둡니다. 당시 연구소에는 187,000 종의 식물 종자가 보관되고 있었고, 그중 40,000개는 식용 작물이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후 연구소의 과학자들은 씨앗을 상자에 담아 지하로 옮기고 교대로 지키며 보호합니다. 러시아의 겨울, 온도는 영하 40도까지 내려갔고 연구자들은 종자를 냉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태울 수 있는 모든 것을 태우기 시작합니다. 그 와중에 굶주린 시민들의 습격을 막기 위해 불침번도 서야 했습니다.


1942년 1월 땅콩 전문가였던 알렉산드르 슈킨이 자신의 책상에서 숨진 채로 발견됩니다. 아사였습니다. 이후 약용 식물 담당자와 벼 담장자도 굶어 죽은 채 발견됩니다. 그들 모두 굶어 죽는 그 순간까지 문자 그대로 ‘씨앗 한 톨’ 건드리지 않고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그들뿐 아니라 병사나 사고 등 약 9명의 직원이 그 기간동안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엄청난 행동도, 바빌로프의 평생의 노고도 큰 보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컬렉션은 리젠코의 손에 넘어갔고, 리젠코는 마구잡이식 근친 교배와 이종 교배로 컬렉션을 망가뜨립니다. 사과, 그렇다면 사과는 어떻게 됐을까요? 제가 사랑하는 사과는 영영 그 조상을 잃어버린 것일까요? 바빌로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과는 족보를 잃은 채 쓸쓸히 구천을 떠돌 운명이 되는 것일까요?




시간을 조금 앞으로 돌려 봅니다. 1929년 사과의 조상을 발견하던 그 시점입니다.


니콜라이 바빌로프가 알마티에 도착합니다. 러시아의 유명한 학자가 온다는 소식에 주민들이 몰려나왔고, 15세 소년 장갈리예프 역시 그곳에 있었습니다. 바빌로프가 연구하는 모습에 감명을 받은 장갈리예프는 레닌그라드로 건너가 바빌로프 아래에서 공부한 후 알마티로 돌아와 농작물을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그의 전문 분야는 '사과'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소비에트가 무너진 후, 80세가 된 그는 미국 식물 과학자들을 초청해 알마티의 사과 연구를 요청합니다. 그 결과 알마티의 사과나무는 유전적으로 다양해서 전 세계 사과나무를 다 합해도 알마티 사과의 20%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사람 손을 타지 않고 산에서 멋대로 자라는 야생종이 살아 남은 탓입니다. 그야말로 알마티는 사과 나무 유전자의 보고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야생 사과를 보존하려 했던 바빌로프의 평생의 염원이 흔들리는가 싶었지만 어쨌든 결실을 맺는 순간입니다.


과학은 과학이고 정치는 정치입니다. 어떤 사실을 마주하고 기분이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지만, 그것을 정책에 반영해서는 곤란합니다. 내가 서 있는 땅이 평평하게 느껴진다고 해서 지구가 평평하다는 정책을 펴서는 곤란하다는 말입니다. 바빌로프의 몰락을 보면서 스탈린의 몰락, 더 나아가 소비에트의 몰락이 너무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은 저만의 생각일까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은 바빌로프 어페어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원래는 ‘비터즈’라는 쓴 술과 ‘애플잭’이라는 사과주가 들어가는 술입니다만 집에 그런 술을 두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래서 집에서 즐기는 저만의 바빌로프 어페어로 준비해 보았습니다.


1. 플라스틱 통에 얼음 넣어주세요


2. 설탕 1ts, 사과즙 1 소주잔, 위스키 1 소주잔 넣고 흔들어 주세요.


3. 파티 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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