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테논 신전

9. 사람 반 돌 반

by 지안

“이곳은 파르테논 신전의 뒷부분입니다. 앞으로 돌아가기 전에 잠깐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신전 뒤로 꽤 넓은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우리처럼 설명을 듣는 사람들이 무리지어 모여 있었다. 연령대도, 인종도 다양하다. 각기 다른 말을 사용하는 가이드들의 열성적인 설명이 바람을 타고 흘러 다녔다.


오전에 잠깐 내비치던 습기를 품은,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던 하늘은 이미 사라졌다. 강렬한 햇빛은 우리에게 그늘로 몸을 숨기는 것이 좋겠다고 넌지시 조언하는 것 같았지만, 쉬지 않고 부는 바람은 그냥 있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풀이 군데군데 패인 바닥에 주저앉아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다.




“이 신전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난 후 페리클레스의 주도로 지어졌습니다. 전쟁 후 파괴된 신전을 복구한다는 이유가 가장 컸지만, 붕괴된 시민 계층의 생계를 지원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습니다. 이 신전 건설에 참여한 시민들은 - 대부분 3계급과 4계급이 참여했는데 - 급료를 받았고, 그것으로 전쟁 이후 피폐해진 생활을 안정시킬수 있었습니다. 신전 건설의 총책임자는 페리클레스의 친구이기도 했던 페이디아스였습니다. 신전 건물에 조각을 하거나, 동상을 만든 사람들도 다 보수를 지급받았습니다.”


그러니까 파르테논 신전 재건은 고대 아테네 식의 ‘뉴딜정책’이었다.


아테네 신전 뒤에서 바라 본 시내 전경. 멀리 필라파포스 언덕이 보인다.


한 인간의 삶을 전적으로 ‘선하다’고 하거나, 절대적으로 ‘악하다’고 평하기는 힘들다. 어떤 면에서 보면 좋은 일이, 결국 나쁜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어느 부분에서는 완벽해 보이는 사람이 다른 면으로는 ‘인간으로 어떻게 저럴 수 있나’싶게 실망스러운 경우도 있다.


아테네의 역사에서 볼 때 페리클레스의 인생이 그랬다.


그는 그리스의 번영을 위해 페르시아와 강화 조약을 맺었지만, 외부의 적이 사라진 국가는 내부에서 무너졌고, 결국 몰락으로 다가선다. 시민을 위한 정책을 펼쳤고, 사리사욕을 채우지도 않았으며, 누구보다 정확한 판단과 정책으로 아테네를 그리스 최고의 도시국가로 만든 사람이기도 했지만, 그 번영을 위해 동맹국들의 동의 없이 자금을 유용하기도 했다. 이 같은 행동은 결국 동맹국들이 아테네에게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페리클레스의 아버지는 함대를 이끈 장군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아테네 최고의 유력 가문 중 하나인 알크마이온 출신이었다. 말하자면 페리클레스는 굳이 민중의 편에 서지 않더라도 정치계에 입문할 수 있을 만큼 유력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대해 가장 많이 알려진 사실은 ‘머리가 길다’는 점일 것이다. 남겨진 조각상은 모두 투구를 쓴 모습인데, 아마도 그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하지만 그 외에는 완벽한 남자였던 것 같다. 일단 투구 아래 얼굴은 잘생겼다.


페리클레스의 흉상. 머리의 투구가 포인트!!! 위키백과 펌.


페리클레스의 장점은 ‘판단력’이었다. 그는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 태어났다. ‘마라톤 전투’의 승리는 그가 태어나고 얼마 후 벌어진 일이다. 전쟁에 참가했던 시민들의 목소리는 한껏 커져 있었다. 제국에 대항해 이긴 것이니 자유민들의 자긍심이 치솟을 대로 치솟은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정치에 입문할 때부터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자유민들과의 관계에 집중했다. 부자들과 대립하며 자신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아테네 시민들의 시선을 극복했다. 이전의 집권자들이 가난한 상태에서 시작해서 부자로 공직에 물러났던 것에 반해 페리클레스는 공직에 있는 동안 재산이 전혀 늘어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적인 연회나 모임 참석도 하지 않았고, 연설을 할 때 외에는 말도 별로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연설은 훌륭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는 그의 연설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투키디데스는 신분이 높은 귀족으로 여러 해 동안 페리클레스의 가장 큰 반대 세력이었다.
어느 날 그에게 스파르타의 왕 아르키다모스가, 페리클레스와 씨름을 하면 누가 이기겠느냐고 물었다. 투키디데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씨름을 해서 제가 그를 내던져도, 그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고 주장해서 말로 이길 뿐만 아니라 씨름을 본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변하게 합니다.”

역시 정치가의 가장 큰 무기는 연설이다. 페리클레스는 ‘제논’과 ‘아낙사고라스’에게 철학과 과학, 웅변술 등을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목소리와 얼굴은 타고날 수 있지만, 그래서 듣는 이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는 있지만, 정작 연설의 내용은 본인이 채워야 한다. 공부하지 않으면 말할 수 없다. 확실히 정치는 공부의 영역이다.





페리클레스는 기원전 467년부터 428년까지 거의 30년 동안 아테네 최고 사령관으로 선출된다. 그가 최고 권력자 자리에 있는 동안 몇 가지 개혁을 단행한다.


헬리아이아(Heliaea)는 30세 이상의 시민 중 추첨으로 뽑힌 6000명으로 이루어진 ‘아테네 최고 법정’으로, ‘아고라’에 모여 중요한 판단을 하던 기관이다. 솔론 혹은 클레이스테네스 시대에 처음 구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페리클레스 이전까지는 대가 없는 봉사여서 가난한 사람들이 생업을 포기하고 이곳에 참석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말하자면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는 반영되기 힘든 구조였다.


페리클레스는 배심원들에게 대가를 지불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2 오볼이었다가 나중에는 3 오볼로 인상했으며, 이는 당시 아테네인의 반나절 품삯에 해당했다고 한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최저 임금’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헬리아이아가 열리던 아테네의 아고라, 프니카



인간은 불평등하다. 이 말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태어나보면 대충 많은 것이 결정되어 있다. 부모의 재산은 내가 교육을 받을 기회가 있는지, 혹시 실패하더라도 재기할 시간과 자금을 감당할 수 있는지 결정한다. 외모는 또 어떠한가.


내가 가진 능력이 지금의 사회와 얼마나 어울리는 지도 중요하다. ‘의사’는 조선시대에는 중인이 담당하던 직업이었다.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 소질이 있는 사람이라면, 될 수 있다면 조선시대보다는 지금 태어나는 것이 좋다. 이런 ‘내가 선택하지 않은 많은 것’들이 내 삶을 미리 결정한다. 그렇다면 그런 불평등을 조금이라도 해소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아닐까?


어떤 쪽이 평등한 사회일까요?

어려운 사람들이 헬리아이아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가난한 자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매도하기보다는 적절한 수준의 보상을 주고 그들의 의견을 듣는 것이 좋다. 그래서 페리클레스는 이런 결정을 한 것이다. 물론 그의 결정이 아테네 인들을 도덕적으로 타락시키고 있다는 악평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하루쯤 밥벌이를 하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들’의 목소리만 듣는 정치보다는 모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정치를 실현했다는 것에 의미를 두어야 하지 않을까.




이후 페리클레스는 집정관과 행정 장관들이 보유했던 여러 사법 권한을 시민 법정으로 이전한다. 또한 기원전 457년에는 부유층만 선출될 수 있었던 집정관직을 제3 계급인 농민과 제4 계급인 노동자도 선출될 수 있게 만든다.


다만 참정권은 아테네인 아버지와 아테니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합법적 자손에게만 허용했다. 아테네의 참정권은 외국인에게는 배타적이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문화적인 폐쇄성과 배타성은 응당 대가를 치르는 법이다. 나쁜 방향으로 말이다. 정책을 만들 때는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 가르침을 받는 알키비아데스, 프랑수아 앙드레 뱅상 - 알키비아데스의 투구는 아빠 돈으로 산 것이겠지..


페리클레스는 군역에 대해서도 보수를 지불하도록 했다. 이전에는 각자의 돈으로 무기를 사서 전쟁에 참여해야 했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알키비아데스는 이렇게 말한다.


“군대가 델리온에서 패하여 후퇴할 때의 소크라테스 선생님의 모습을 자네들도 봤어야 하는 건데. 나는 그곳에서 기병으로 복무했고, 이분은 중무장 보병이었네.”


알키비아데스는 전쟁에 필요한 갑옷이나 칼 등의 물품뿐 아니라 ‘말’까지 소유할 수 있을 정도의 부유한 남자였다. 그래서 그는 기병으로 참전했다. 그에 비해 소크라테스는 (비록 그의 애국심은 뛰어났지만) 보병의 무기를 구비할 정도의 재산밖에 없었다. 그래서 알키비아데스보다 훨씬 나이도 많았지만 보병으로 참전한 것이다.


문제는 또 있다. 소크라테스가 군대에서 전투에 참전하고 있는 중에는 그의 가족에게 생활비를 벌어다 줄 수 없다(아테네는 시장을 보는 일도 남자나 노예만 가능했다. 하물며 상업에 참여하는 것은 여자에게는 절대 불가능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전투용품을 마련할 수 없거나, 당장의 생활비가 궁핍한 가난한 시민들 중에는 군역을 회피하려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무기가 없으면? 전쟁터에서 내편이든 적의 것이든 전사자의 것을 훔치기라도 하면 된다. 하지만 가족이 굶어서는 곤란하다. 페리클레스가 보수를 지불하기 시작한 이후, 군대에 지원하는 숫자가 늘고 당연히 국방력도 커졌다.


또한 페리클레스는 해외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식민지로 가난한 사람들을 이주시켜 땅을 주고, 함선을 추가로 건조하고, 병기고를 세우고, 곡물 거래소도 새로 건립한다. 이런 일련의 일들은 대규모 고용창출로 이어진다.




그의 행동은 ‘아테네’의 입장에서 보자면 절대적으로 선한 일로 보인다. 그러나 그리스에 아테네인만 살았던 것은 아니다. 엄청난 자금이 들어가는 파르테논 신전을 짓기 위해 페리클레스는 델로스 동맹의 기금을 사용한다.


뼈대만 남은 건물 잔해로 전체적인 파르테논 신전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수 있는 당신이 챔피언~!


델로스 동맹은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후 페르시아의 재공격에 대비할 명분으로 기원전 477년 아테네 및 에게 해의 여러 섬의 폴리스들이 함께 결성한 것이다. ‘전쟁 대비’가 명분이었으므로, 각국은 군함과 군인을 제공하든가 아니면 그것을 운용할 자금을 내야 했다. 아테네를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는 자금을 대는 쪽을 택했다.


그런데 448년 드디어 아테네와 페르시아 사이에 강화가 성립한다. 전쟁의 위험이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447년 페리클레스는 파르테논 신전을 착공하고, 그 비용으로 델로스 동맹의 기금을 사용했다.


그의 반대파와 델로스 동맹국들 사이에서 이 일은 공격의 대상이 된다. 그들은 전쟁 비용으로 그리스 전체에서 거둔 돈을 아테네가 마음대로 쓰고 있다고 비난했다(사실 이 비난은 맞는 말이다). 이에 대해 페리클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아테네가 페르시아 군을 막아내고 있는 한, 동맹국들은 전쟁 기금을 어떻게 쓰든지 상관할 것 없소……. 젊은 청년들이 군대에 나가 전쟁을 하면서 보수를 받는 것처럼, 여기에 남아 공업과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보수를 주어야 하는 것인데, 일을 하지 않고 돈을 받을 수는 없는 것 아니겠소. 그래서 건축 설계와 기술이 필요한 이 사업은 민중들에게 돈을 벌 수 있는 일거리를 주어 국토를 지키는 사람, 배를 타는 사람들처럼 나라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수입을 가져다주는 것이오. 돌, 청동, 상아, 금, 나무 같은 여러 공사 재로는 그것을 다룰 줄 아는 여러 공예 기술자들이 필요하오. 또 이것들을 운반하기 위해서는 상인이나 뱃사람, 수레를 끄는 사람, 마부, 배 만드는 사람이 필요하고, 또 그들을 위해서 신발을 만들고 가죽을 다루고, 석탄을 캐내고, 나무를 자르고, 길을 닦는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오. 그리고 이런 기술자뿐만 아니라 기술이 없는 사람들도 일자리를 가지게 되는 것이니, 나이가 많고 적거나 신분이 높고 낮은 것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이 일을 하게 될 것이며, 아테네는 결국 누구나 다 잘 사는 곳이 되는 것이오.”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중에서

맞다. 아테네의 입장에서 보자면, 처음부터 끝까지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하지만 조금만 눈을 돌려 동맹국의 입장이 되어보면 이 말이 얼마나 오만하고 이기적인 말인지 알 수 있다.




결국 432년 델로스 동맹의 일원이던 ‘메가라’는 동맹에서 탈퇴하고 스파르타가 주도하고 있던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가입을 선언한다. 동맹국들의 동요와 이탈은 계속되고, 결국 스파르타를 주축으로 하는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아테네의 전쟁이 시작된다. 아테네의 입장은 이전과는 달라졌다. 메가라처럼 델로스 동맹의 일원이었던 많은 나라들이 펠로폰네소스 동맹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이 전쟁은 해상 세력 아테네와 육상 세력 스파르타의 한 판 승부였다.


아테네 함대는 해군을 동원해 펠로폰네소스 연안 마을을 초토화시켰다. 스파르타 육군은 육로로 내려오며 곡물을 약탈하고 토지를 황폐화시켰다. 페리클레스는 성 밖의 주민들을 모두 아테네 성벽 안으로 불러들인다. 병사들에게는 전투에 응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해군의 승전 소식이 알려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시민들을 설득한다.


전략적으로 페리클레스의 판단은 옳았다. 육상에서 맞붙었다면 아테네의 육군은 스파르타를 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페리클레스가 계산하지 못한 또 하나의 요소가 있었다. 역병이다(아마 말라리아였을 거라고 현대의 역사가들은 추측한다). 거의 3년간 창궐하여 수많은 도시민을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전해진다.


지친 시민들은 전쟁의 책임을 페리클레스에게 묻는다. 그를 기소하여 파면한다. 결국 다시 페리클레스를 공직으로 불러내기는 하지만, 이미 역병이 그를 덮친 뒤였다.


페리클레스 이후의 지도자들은 육상에서도 전쟁을 시작한다. 왜 그랬을까. ‘육군의 스파르타’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일까? 영화 ‘300’을 못 봤기 때문일까?(스파르타~!)


아테네인이여, 300 안보셨습니까?

페르시아와의 마지막 전투가 있었던 479년부터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벌어진 431년 사이 약 40년은 그리스의 평화기였다. 이 시기를 투키디데스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깔끔하게 정리했다.


펠로폰네소스와 아테네 둘 다 세상을 몰라 무기를 잡고자 열망한 젊은이로 가득했다.


422년 스파르타군과 아테네군은 칼티디아에서 맞붙어 대규모의 사상자를 내고 양쪽 모두 사령관까지 잃는 엄청난 전투를 벌인다. 그리고 드디어 421년 ‘니키아스 강화’라는 이름의 강화조약을 맺고 전쟁은 끝이 난다. 10년간 전투가 이어졌지만 아테네는 얻은 것이 없었다.


아테네를 찾아 온 40년의 평화는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지만, 그로인해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전쟁도 불사하려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은 그 평화의 반작용이었다. 페리클레스 이후 아테네는 이렇게 서서히 영광을 잃고 몰락해간다.


페리클레스의 일생을 읽다 보면 진정 ’ 아테네’를 위했던 사람이었다는 느낌은 강하게 든다. 그는 너무 ‘아테네만’을 위했던 것이다. 영원히 떠 있는 태양이 없듯이 언젠가 아테네의 국력이 쇠할 수 있다는 가정도 한 번쯤은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시간이 영원히 아테네의 편일 것이라고 오판했다. 슬픈 일이다. 지도자가 잘못된 판단을 하면, 대부분 고난은 함께, 혹은 국민들이 더 많이 겪게 된다. 지금도 반복되는 역사다.



흩어져서 사진을 찍던 일행들이 가이드 앞으로 하나 둘 모여들었다.


“이제 이동해서 신전의 앞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많고 돌이 미끄러우니 조심하세요.”


가이드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나도 일행들에 맞춰 걷기 시작했다. 길 양쪽으로는 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심지어 웨딩 촬영을 하는 커플도 있었다! 신전 앞에서 하는 사랑의 맹세라…….


“좋을 때다.”


일행 중 누군가가 말했다. ‘사랑하고 있을 때’는 좋은 때다. 아무리 힘든 시기라도 사랑하는 사람만 있다면 견디기가 조금은 쉬워지는 법이다. 무미건조하고 정치만 생각했을 것 같은 페리클레스의 인생에도 사랑 이야기가 남아 있다.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페리클레스는 ‘아스파시아’라는 이름의 여성을 만난다. 어떤 사료에는 ‘창녀(헤타이라Hetaira)’였다고 전해지고, 어떤 사료에는 ‘창부를 집에 둔’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으로 봤을 때, 평범한 여성은 아니었던 것 같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는 ‘아스파시아’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스파시아는 그 시대 최고의 정차가들을 마음대로 움직였던 여자로, 철학자들도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그녀는 밀레토스 사람으로 악시오코스의 딸인데 그리스에서 가장 권위 있는 사람들에게만 사랑을 베풀었다고 하는데 흔히 이오니아의 타르겔리아에 비유되고 있다.


당시 페리클레스에게는 크산티포스와 파랄로스라는 두 아들을 낳아 준 아내가 있었다. 아내는 이후 다른 남자와 결혼하면서 페리클레스를 떠난다.


아스파시아 흉상. 위키백과 펌.

아무튼 아스파시아는 당대에 꽤 유명한 여성이었던 것 같다. 그런 아스파시아에게 페리클레스가 사랑을 느낀 것이다. 아스파시아의 나이는 25세 무렵이었는데, 페리클레스와의 나이 차이 정도는 당시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아내가 떠난 후, 페리클레스는 아스파시아와 ‘함께’ 산다. 법적으로 부부라는 관계로 정의했는지 여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적어도 비공식적으로 아스파시아는 페리클레스의 아내로 대접받았던 것 같다. 이것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페리클레스와 같은 아테네의 최고 공직자가 외국인, 그것도 ‘헤타이라’라고 알려진 여인과 함께 산다니…….




알려지기로, 페리클레스는 그 사랑에 진심이었던 것 같다. 아스파시아를 만나기 전에는 사적인 연회에도 참석하지 않고 업무 외에는 관심 없었던 그가 점점 공적 활동에 소홀해지기 시작했다. 개인적인 일을 하며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시민들은 불평하기 시작했다.


아스파시아는 그의 집(그러니까 페리클레스와 아스파시아가 사는 집)을 ‘살롱’ 같은 장소로 만들어 예술, 과학, 문학, 철학과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드나들도록 만들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스파시아로부터 웅변술을 배웠다고 말했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첫 희생자를 기념하는 페리클레스의 연설문을 쓴 사람도 그녀였다고 전해진다.


페리클레스는 아스파시아의 사생활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이따금 자신의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는 자리에는 언제나 아스파시아가 동석해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페리클레스는 그녀를 찾아오는 손님들도 환영했다. 당시 아스파시아와 비슷한 연배였던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그녀의 집을 방문해 대화를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퇴근길에 이들을 본 페리클레스는 사랑하는 사람을 한번 안아줬을 뿐 그들의 대화에는 간섭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페리클레스는 파르테논 건축 현장에도 아스파시아를 데리고 왔다. 축제 기간이 아니라면 집 밖으로도 나올 수 없었던 그리스의 여자들과 분명 다른 대접을 받은 것이다. 내가 걷는 이 길로 아스파시아가 걸어 올랐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스파시아는 파르테논 건축을 총괄한 페이디아스의 설명을 듣고 의견을 개진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두 사람에게 아이가 태어난다. 하지만 그 아이는 아테네 시민권을 가질 수 없었다. 페리클레스 자신이 만든 법 – 아테네인 아버지와 아테네인 어머니 사이에서 합법적으로 태어난 아이만이 시민권을 갖는다- 때문이다. 모르긴 해도 ‘아차’ 싶었을 것이다.




페리클레스의 말년은 아름답지 않았다. 그의 큰아들 크산티포스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아내와 아버지가 정을 통했다는 이야기까지 퍼트렸다고 한다. 당연히 아버지와 말도 섞지 않을 만큼 사이가 나빠진 후 역병에 걸려 죽었다. 작은 아들인 파랄로스 역시 죽는다. 그전까지 의연하게 버티던 페리클레스는 작은 아들의 장례식에서 비통하게 울었다고 전해진다.


페리클레스의 정적들은 파르테논 신전의 책임자(페리클레스의 친구이기도 했던)였던 페이디아스가 공사비를 횡령했다고 고소하여 유죄를 받아냈다.


아스파시아에 대해서도 그리스 신들을 존경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했다. 헤타이라인 그녀가 페리클레스에게 여자를 공급하고 있다는 억지 주장도 펼쳤다. 1500명의 배심원이 모인 재판에서 페리클레스는 자신의 모든 웅변술과 눈물까지 동원하여 그녀를 변호해 사건을 기각시켰다. 하지만 페리클레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과연 아테네 사람들을 용서할 마음이 생겼을까?


아테네인들은 결국 미안했던지 페리클레스와 아스파시아 사이에 태어난 아들을 ‘특별히’ 시민으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아테네 시민권을 획득한 아들 페리클레스 역시 아버지가 죽은 뒤 ‘집정관’에 선출되지만 별다른 업적은 내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능력은 대물림되지 않는다.




파르테논 신전 앞에 도착하기 전, ‘니케의 신전’을 지나 '에렉테온 신전'이 보이는 곳에 걸음을 멈췄다.


저기... 신고 오신 신발을 좀 볼까요?”


가이드가 말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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