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위하는 마음?

13.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

by 지안

가이드의 설명처럼 서양 철학은 그리스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실 철학만 그런 것도 아니다. 과학도, 의학도, 인간의 머리에 나오는 대부분의 것들이 (서양의 경우) 그리스에서 뻗어 나왔다.


1993년 출판된 리언 레더먼과 딕 테레시가 쓴 ‘신의 입자’는 ‘입자물리학의 역사’에 관한 책이다. 입자 물리학이라니…… 근사하고 현대적이다. 하지만 20세기 양자 역학까지 이어진 긴 역사를 말하기 위해 가장 먼저 소환한 인물은 그리스의 ‘데모크리토스’였다. 데모크리토스는 소크라테스와 비슷한 시기 활동했던 철학자로 <자연에 관하여>나 <행성에 관하여> 등 무려 67권의 책을 썼다고 알려져 있는데, 남은 것은 없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속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가르침 역시 플라톤이 쓴 글 속에 남아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여러 작품을 직접 쓴(비록 전해지지는 않지만) 데모크리토스와는 달리 소크라테스 자신은 단 한 줄도 글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많은 제자 중에는 ‘플라톤’ 같이 후세에도 존경받는 인물이 있지만, ‘크리티아스’처럼 당대에 이미 악명을 떨쳤던 이도 있었다.


데모크리토스. '원자'라는 개념을 처음 사용했던 인물. 위키 펌




잘못 거둔 제자로 지목된 다른 사람이 ‘알키비아데스’다. 저번 글에서 말한 알키비아데스의 넋두리(소크라테스에게 매력 어필을 해보았으나 무시당했다는)는 그의 나이 34-35세 정도에 나온 말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알키비아데스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지도 편달을 시작한 것은 15세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매우 오래된 관계였다는 말이다.


알키비아데스는 기원전 450년경 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크라테스가 기원전 470년경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으니, 둘은 대략 20년 정도 차이가 나는 셈이다. 알키비아데스의 아버지는 부유했으나, 코로니아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의 어머니는 아테네의 가장 유력한 가문 중 하나인 알크마이온 가문 사람이자 페리클레스의 친척이어서 어린 아들의 양육을 당대 최고의 권력자였던 페리클레스에게 부탁했다.


알키비아데스. 잘 생겼으니 한번 더. 위키 펌

외모에 관한 한 알키비아데스는 전설이다. 게다가 가문도 훌륭하고 무엇보다 부자다. 다 가진 남자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알키비아데스는 어려서부터 용모가 아주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그의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했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했다고 한다…….

알키비아데스는 말을 할 때 혀를 약간 굴리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것까지도 그에게는 매력이 되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고 한다.

알키비아데스는 그러니까 ‘될 놈 될’의 표본 같은 남자였다.




그는 20세 정도에 소크라테스와 함께 포테이다이아 전투에 참전했고, 26세에는 델리온 전투에 함께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알키비아데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런 일이 있은 뒤 우리는 함께 포테이다이아로 출정하여 그곳에서 한솥밥을 먹게 되었네.

그런데 맨 먼저 지적할 것은 고생을 참고 견디는 데서는 나를 포함해 어느 누구도 이분을 당할 수 없었다는 것이야…….. 자네들이 원한다면 이분이 싸움터에서 어떻게 처신하셨는지 또 다른 일화를 하나 이야기하겠네. 이것도 당연히 이분에게 돌려드려야 하니까.

장군들이 내게 감투상을 준 바로 그 전투에서 내 목숨을 구해준 사람은 다름 아닌 이분이네. 이분이 부상당한 나를 버리려 하지 않고 내 무구도 내 목숨도 구해주셨으니까. …..


소크라테스는 부상당한 전우들을 부축해 함께 후퇴하는 모범을 보이며 알키비아데스에게 큰 인상을 남긴다.




알키비아데스는 입후보 가능 연령인 30세가 되자마자 선거에 나가 집정관으로 선출된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그리고 그들의 동맹국이)가 '니키아스 협정'을 맺으며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끝낸 다음 해다. 공직에 나간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의 셀럽이 된다.


알키비아데스는 사치스러운 잔치를 벌이면서 방탕한 생활을 하고, 여자들처럼 빨간 망토를 끌며 공회당을 휩쓸고 다녔다. 그는 배의 갑판 앞부분을 떼 내고 가죽끈으로 침대를 만들었으며, 황금으로 씌운 방패에는 휘장 대신 벼락 몽둥이를 든 에로스의 모습을 새겨 넣었다.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중


이때 스파르타의 동맹국 중 몇몇이 ‘니키아스 협정’을 거부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스파르타는 이미 약해졌기 때문에, 아테네와 동맹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알키비아데스는 이들 나라- 아르골리스, 엘리스, 아르카디아-와 4국 동맹을 맺은 후 만티네아에서 스파르타와 전투를 벌인다. 그러나 결과는 스파르타의 승.




민심이 흉흉해지자, 아테네 정치가들은 시민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멜로스에 함대를 보내 영토의 일부를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이유는 신통치 않다. 그 땅이 아테네에 필요하니 그냥 달라는 것이다. 깡패가 따로 없다. 멜로스인들은 분연히 일어선다. 그러나 압도적인 숫자의 아테네 군사들은 멜로스를 말 그대로 쓸어버린다.


아테네는 생포된 모든 성인 남자를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팔아버렸다. 멜로스 땅에 500명의 아테네 인들을 이주시켰다. 타국을 그냥 접수해버린 것이다. 할 말이 없다. 알키비아데스는 그 정책을 결정한 사람 중 하나였다. 내 나라의 이익만이 정의인 살벌한 국제 사회다.




이즈음의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도시를 휩쓸었던 역병으로부터 회복되고 있었고, 무역을 통한 부의 유입도 이전 수준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알키비아데스는 만족할 수 없었다.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의 부유한 도시들까지 갖고 싶었다. 그곳에서 생산되는 곡물과 물자, 인적 자원이 아테네를 더욱 부유하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생각만 했으면 좋았겠지만, 그는 이를 실행에 옮겼다.


기원전 416년 시칠리아의 도시국가 ‘세제스타’가 사절단을 파견해, 역시 도시국가인 ‘시라쿠사’가 스파르타에 식량과 자금을 제공하려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니 시라쿠사를 손봐 달라는 것이다.


알키비아데스는 시칠리아 원정을 제안한다. 알키비아데스의 동료이자 정치적 적수였던 니키아스(니키아스 협정을 주도해 스파르타와의 전쟁을 끝낸 그 니키아스!)가 아무리 반대해도 소용없었다. 민회는 시라쿠사에 전쟁을 선언하고 군자금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싸우자’는 알키비아데스와 ‘그러면 안 된다’는 니키아스를 묶어 전쟁터로 내보낸다. 아마 니키아스는 황당했을 것이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소크라테스 감옥'이라는 소개문도 있다

어쨌거나 전쟁 준비는 착착 진행되었고, 출정 예정일을 며칠 앞둔 어느 밤 사건이 벌어진다. 아테네 거리의 많은 헤르메스 상이 한꺼번에 훼손된 것이다.


지금 '헤르메스'라고 하면 '에르메스' 즉 '고가품이나 명품'이 떠오르지만, 고대 그리스에서는 '경계, 횡단,표지석'을 의미했다. 무덤의 비석, 집 사이의 경계석, 평원의 이름을 적은 표지석 등이 모두 헤르메스와 관련이 있다. 그래서 많은 아테네 인들이 신의 뜻을 전하는 전령이자 여행자, 목동의 신이기도 한 헤르메스의 조각상을 집 혹은 관공서 앞에 장식 겸 수호신으로 세워 놓았다. 그런 헤르메스상의 눈,코, 남근이 밤 사이 망가진 것이다. 꽤 심각한 문제였다.




조사관들은 '알키비아데스와 그의 술 취한 친구들의 짓'이라는 외래인과 노예들의 증언을 수집했다. 알키비아데스는 부인한다. 출정 전 재판을 요구했다. 전투에 임하기 전 의혹을 털고 가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사관들의 증거만으로는 알키비아데스에게 유죄를 내릴 수 없을 것이라 판단한 그의 반대파들이 재판을 지연시킨다.


기원전 415년 알키비아데스가 탄 함대가 아테네의 항구를 떠난 얼마 후, 이번에는 확실히 재판에서 이길 수 있는 다른 증거가 수집된다. 화가 난 민회는 빠른 배를 보내 전투함에 승선 중인 알키비아데스를 소환하도록 한다. 과연 그 신성모독적 행위가 알키비아데스가 한 짓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플루타르코스는 이렇게 쓰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를 고발했던 사람들은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고발자 중에서 어떤 사람은 조각상을 깨뜨린 사람이 누군지 어떻게 아느냐는 질문에 달빛이 밝아서 얼굴을 보았다고 했지만, 사건이 일어난 날은 초승달이 뜬 날이었다.

앞뒤가 맞지 않는 증언을 듣고, 생각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 사건의 소송을 그만두는 것이 옳다고 했다. 그러나 흥분한 민중들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전투함이 중간 기착지에 도착했을 때 알키비아데스는 도주한다. 어디로? 스파르타로.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 민회에 나타나 스파르타가 아테네를 격퇴하고 귀족정을 세울 수 있도록 돕겠다고 제안한다.


그는 ‘군사고문’이 되어 스파르타 군을 시라쿠사에 파견한다. 시칠리아 섬에 도착한 아테네 군을 치기 위해서다(야, 알키비아데스 너 님이 하자고 한 전쟁이잖아요!).


또한 아테네 영토 북쪽의 ‘데켈레이아’를 아예 점거하라고 권한다. 펠로폰네소스 전투 이래, 봄이 되면 스파르타 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아테네 국경 근처 데켈레이아 지방까지 와서 군사 시위를 벌이다 가을이면 되돌아가는 일을 매해 반복하고 있었다. 스파르타에서 데켈레이아까지는 멀다. 왕도 군대도 힘들고, 돈도 많이 든다. 데켈레이아를 점령해 기지로 삼으면 굳이 군대 전체를 왕복시킬 필요가 없다. 군대를 그곳에 주둔시키고, 왕을 비롯한 지휘관만 왕복하면 훨씬 편해진다.


게다가 테켈레이아는 아테네의 은광까지 가는 길목에 있었다. 스파르타 군대가 계속 주둔하게 되면 아테네는 은을 싣고 나올 수 없게 된다. 이것은 아테네 경제에 큰 타격이었다.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의 급소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분이 니키아스. 시칠리아 원정에서 패배해 스파르타에 포로로 잡혀 처형당했다.

아테네의 시칠리아 원정이 실패로 끝난 후(심지어 니키아스는 이 원정에서 죽었다), 알키비아데스는 이오니아 인근 섬나라 국가들을 돌며 아테네에게 반란을 일으키도록 사주한다. 아테네 입장에서 보자면 반역도 이런 반역이 없다.




스파르타 인들은 알키비아데스에 대해 신뢰를 갖게 된다. 더하여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이 아테네에서 했던 모든 습관을 버리고 철저히 스파르타인처럼 생활한다. ‘검은 죽’도 맛있게 먹고, 운동을 즐겼으며, 의복과 외모도 스파르타인처럼 바꿨다. 하지만 잘생김은 여전했다. 스파르타인들은 열광했다.


모든 것을 스파르타 식으로 바꿨지만, 알키비아데스는 한 가지 습관만은 도저히 버릴 수 없었던 모양이다. 스파르타의 왕 아기스는 일 년의 절반 정도는 출정해야 했다. 왕이 스파르타에 머물고 있을 때에도 알키비아데스는 눈에 띄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30대 중반인 아테네 최고 미남의 외모가 티 나지 않았을 리 없다. 어쨌거나 왕이 자리를 비운 사이 왕비인 티마이아가 임신하고, 남자아이가 태어난다. 왕비는 자신의 측근들에게 ‘사실 아들은 알키비아데스의 아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말한다. 혹은 그런 일이 없더라도 아이가 너무 잘생겼었는지도 모른다.


마침내 사실을 알게 된 아기스 왕이 알키비아데스를 잡으려고 했을 때는 이미 그가 페르시아의 장군 티사페르네스의 땅으로 몸을 숨긴 다음이었다.




아테네가 받아 든 시칠리아 원정 실패의 결과는 참혹했다. 큰 병력이 움직인 만큼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숫자도 많았다. 죽거나 노예로 사라진 인구가 시민의 절반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과부와 고아의 숫자가 급격히 증가했다. 페리클레스가 동맹의 기금까지 빼돌리며 차곡차곡 축적해 놓았던 국고도 텅 비었다. 아테네의 몰락이 임박했다고 생각한 동맹국들은 더 이상 기금을 보내지 않았다. 아테네에게서 등을 돌리고 스파르타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와도 손을 잡는다.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전세는 스파르타의 생각대로 풀리지 않았다.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가는 법이다. 아테네의 방어는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그 사이, 아테네에서는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민회를 해산시켜 버린다. 부자들도 이 반란을 지지한다. 알키비아데스도 이 반란의 지원자 중 한 사람이었다. 새롭게 만들어진 정권으로 복귀하고 싶었던 것이겠지.


전쟁터에서 이 소식을 들은 병사들은 기가 막혔다. 그들 자신이 시민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라를 위해 전쟁터에서 죽도록 싸우고 있는데, 귀족과 부자들이 시민들을 내쫓고, 권력을 빼앗다니. 군인들은 민주정으로 복귀하지 않으면 아테네를 포위 공격하겠다고 공표한다. 귀족들은 스파르타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아, 진짜 미친거 아니냐고요), 스파르타의 대응은 느렸다. 귀족들이 세운 정부는 해외로 도주했고, 시민들은 옛 정체성을 회복한다.




시민들은 계속된 전투와 어지러운 정세를 정리하기 위해 사면 약속과 함께 알키비아데스를 불러들인다. 그들은 알키비아데스가 반란을 일으킨 귀족을 지원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아테네는 싸움 잘하는 장군이 필요했으며, 어쨌든 알키비아데스는 그 시절 가장 유능한 장군이었다. 그는 아테네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아테네로 복귀를 앞두고 알키비아데스는 사모스의 해군을 지휘하여 스파르타 함대를 궤멸시킨다. 아테네 시민에게 선사할 작은 선물을 마련한 것이다.


기원전 407년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 전체의 환호 속에 귀환한다. 하지만 환호만 했을 뿐, 군대를 움직일 자금은 지원하지 않는다. 국고가 텅 비어 지원할 군자금도 없었기 때문이다.


알키비아데스는 휘하 장병들에게 지급할 월급을 마련하기 위해 잠시 군을 이탈한다. 알키비아데스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그의 함대는 스파르타 군에게 그야말로 박살이 난다.


아테네 시민들은 또다시 알키비아데스를 비난하기 시작한다. 패전의 책임을 물어 그의 지휘권을 박탈하고 소환한다.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도 스파르타도 아닌 제3의 땅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스파르타와의 전쟁은 아직 진행 중이었다.




아테네 사람들은 아크로폴리스의 조각상과 제물의 금은 등을 녹여 새 함대를 구축한다. 모자란 전투병은 노예를 해방시켜 채우고, 8명의 장군을 뽑아 스파르타와의 전투를 위해 출격한다. 그러나 전투 중 함선이 침몰하고, 폭풍우에 병사들이 익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민회는 8명의 장군을 처형할 것을 제안했다.


그날 집회를 관장한 대표자 중 하나였던 소크라테스는 이 제안 발의를 거절했다. 사실 말도 안 된다. 폭풍우의 책임을 묻는다면 포세이돈이나 제우스가 져야 한다. 지금도 예보가 힘든 폭풍우를 당시 장군들이 어떻게 예측해 피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뜻과는 상관없이 민회는 8명의 장군을 처형한다. 며칠 후 민회는 자신들의 결정을 후회하지만, 그래 봐야 죽은 장군들이 살아 돌아올 수는 없었다.



알키비아데스의 죽음, 미셀 드 나폴리 작, 위키 펌.

이제 장군도 없는 아테네 함대는 마르모라 해에서 스파르타군과 마주했다. 근처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 함선의 위치가 전략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을 알아챈다. 어려움을 무릅쓰고 접근해 위험을 알리지만 그의 조언은 무시된다. 다음날 208척의 아테네 함선 대부분이 침몰되거나 포획되고 살아남은 포로들은 모두 처형되었다. 알키비아데스도 더는 어쩔 수가 없었다.


스파르타는 알키비아데스의 저력을 알고 있었다. 알키비아데스가 처음 스파르타로 왔을 때 아테네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알키비아데스는 망명 생활을 한 적도 있어 누구보다 스파르타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스파르타는 알키비아데스에 대한 암살 명령을 내린다 그는 페르시아 장군 파르나바조스에게서 도피처를 구한다. 파르나바조스 장군은 이 마약같은 남자에게 집 한 채와 '티만드라'라는 여성을 준다. 알키비아데스는 이곳에서 나름 유유자적 생활한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설득으로 페르시아 왕은 알키비아데스를 죽이기로 결정한다. 기원전 404년 두 명의 암살자가 그의 집에 불을 지른다. 알키비아데스는 불타는 집에서 뛰쳐나와 사투를 벌였지만 암살자의 칼에 의해 살해된다. 그의 나이 46세였다. 티만드라는 알키비아데스의 시체를 안아 자신의 옷으로 덮어준 후 정성을 다해 장례를 지내주었다고 한다.





스파르타는 델로스 동맹에 가입한 여러 도시에 독립을 촉구한다. 델로스 동맹은 해체되고, 해상권을 잃은 아테네는 식량난에 빠진다. 결국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항복한다.


‘크리티아스 ’ 중심의 30인 평의회가 구성되고, 친스파르타 정권이 들어선다. 5000명의 민주파를 추방하고, 150명 이상의 반대파를 사형시켰으며, 재산을 몰수하고, 신전의 물건들을 사유화했다. 소크라테스는 한 때 제자였던 크리티아스에 의해 공개 강연을 금지당했다.


그러나 1년도 되지 않아 이들의 권력은 무너졌다. 1000여 명의 무장한 민주파가 아테네로 들어와 친스파르타 정부를 쫓아냈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간 듯 보였다. 하지만 복권된 민주정부가 70세가 넘은 늙은 철학자에게 내린 사형 판결은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500명의 시민들이 모인 법정에서 60표 차로 소크라테스의 사형이 결정되었다. 소크라테스에게는 죽음 대신 망명이나 비슷한 다른 형벌을 요청할 권리가 있었다. 친구 클리톤은 뇌물을 써 도망가자고 그를 설득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거부하며 이렇게 말한다.


“….. 법률은 아마도 나만큼 명시적으로 그들에게 합의해준 아테네 인들은 많지 않을 것이라며 틀림없이 나를 나무랄 걸세.

“소크라테스, 우리에게는 우리도 나라도 그대 마음에 들었다는 유력한 증거들이 있네. 이 나라가 그대 마음에 썩 들지 않았다면, 그대는 모든 아테네인 중에서 유별나게 시종일관 이곳에 머물지는 않았을 테니 말일세.

그대는 이스트모스에 딱 한 번 간 것 말고는 축제를 구경하려고 우리 도시를 떠난 적이 없으며, 군 복무 이외의 다른 목적으로 외지에 간 적이 없네. 그대는 남들처럼 국외여행을 한 적이 없으며, 다른 나라와 다른 나라 법률을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네. 그대는 우리와 우리나라로 만족했으니까. 그대는 그처럼 단호히 우리를 택했고, 시민으로서의 모든 활동에서 우리를 준수하기로 합의했다네.

또한 그대는 이 나라에서 자식들을 낳았는데, 이는 이 나라가 그대 마음에 들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인가! 더군다나 그대는 재판받을 때도 그대가 원했다면 추방형을 제의할 수도 있었네. 그랬더라면 지금 그대가 나라의 의사에 반하여 행하려고 하는 것을 그때 나라의 승인을 받아 행할 수 있었을 것이네. 하지만 그때 그대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계속 호언장담하며 그대 말대로 추방형보다는 사형을 택했네.

그런데 지금 그대는 그때 한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법률인 우리를 무시하고 우리를 파괴하려 드는구려. 그대는 시민으로서의 모든 활동에서 법률을 준수하기로 합의해놓고 계약조건과 합의 사항을 어기고 도주하려 하는데, 그것은 가장 천한 노예나 할법한 짓이라네.

그대는 먼저 다음 질문에 대답해주게. 그대는 시민으로서의 모든 활동에서 법률인 우리를 말이 아닌 행동으로 따르기로 합의한 것이라고 우리가 주장한다면 우리가 하는 말이 진실인가, 진실이 아닌가?”

(이렇게 묻는다면) 크리톤, 우리는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진실이라고 시인할 수밖에 없겠지?

- 플라톤의 <크리톤> 중에서


아테네의 황금시대는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함께 끝났다. 자신이 사랑한, 무지를 일깨워 주기 위해 그토록 애썼던 민중들에 의해 그는 목숨을 잃었다. 어쩌면 완전히 망가진 아테네를 보지 못한 것이 소크라테스에게는 오히려 축복이었을 수도 있다.


외모를 타고난 것도, 대단한 부와 권력을 소유한 것도 아니지만 그의 사유와 지식들은 몇 천년을 지낸 지금까지도 영향을 준다. 그는 평생 고민했고 옳은 결정을 내렸다. 그 결정이 자신에게 큰 손해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지금까지 기억되는 이유일 것이다.


한편, 한 인간으로서 알키비아데스의 능력은 대단했던 것 같다. 타고난 재능이 특별했을 뿐만 아니라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있었고(아무튼 소크라테스의 오랜 제자였으니) 훌륭한 장군이었다. 인생을 즐길 줄 알았고, 상황을 내다볼 줄도 알았다. 그러나 위기에서 그가 한 선택들이 과연 옳았는가는 의문이다.


어쩌면 특별한 그만의 재능이 다른 사람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선택들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이 아닐까. 결국 그의 재능이 그를 다치게 한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단 하루만이라도 알키비아데스 같은 외모로 살아보고 싶다. 정말이지 이렇게 생긴 사람들은 세상이 얼마나 만만하고 편할까? 무슨 짓을 해도 다들 입만 벌릴 뿐 용서해주니 말이다.




“이제 조금 걸어야 합니다. 신발끈을 단단히 해주세요. 필로파포스 언덕으로 가보겠습니다.”


가이드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녕히 계세요, 소크라테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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