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의 딜레마
코넌 도일의 셜록 홈스 시리즈 중 “입술 삐뚤어진 사나이”는 존경받는 사업가로 알려진, 실상은 구걸로 막대한 돈을 벌고 있던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직접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았지만(이 이야기는 주인공을 찾아 달라는 부인의 부탁으로 시작한다. 결국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거지로 분장한, 그래서 사람들을 속인 그의 비도덕적인 부분은 단죄가 마땅하다.
관련하여 이따금 해외 토픽 같은 것도 나온다. “잉글랜드에서 걸인을 잡아 들었는데, 그중 집 없는 사람은 없었다”거나 “구걸만으로 1년에 최고 몇만 파운드를 벌었다더라”같은 기사가 그것이다. 거리에서 구걸하는 누군가를 볼 때, 마음 한 켠에는 “저 사람도 혹시…..”하는 의심이 강가의 안개처럼 퍼져나간다. 의심을 방패 삼아 감정적 동요 없이 외면하기도 상대적으로 쉽다.
이와 달리 감정적으로 딱딱해지는 경우가 있다. 바쁜 지하철 통로, 마주 오는 사람을 피해 가기도 벅찬 번화가에서 전단지를 주는 누군가를 만날 때다.
젊은 사람들이 나눠주는 번화가의 가게 전단지의 경우는 쉽다. 그들은(사장이 직접 나눠주는 것이던 알바를 고용했던) 나름의 유머를 던지기도 하고, 자신 있는 손놀림으로 교묘하게 내미는 기술을 구사하기도 한다.
그런데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딱 봐도 그들 자신조차 도움이 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여자이거나 노인이거나 노인인 여자들이 많다) 전단지를 내밀 때, 당황하게 된다. 세 가지 상태가 혼재되기 때문이다. 일단 나는 바쁘고, 둘째 그들은 이미 ‘혐오’를 불러일으켰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도덕률에 매어 있다. 세 가지가 맞물린 결과, 마음속에는 폭풍이 치기 시작하고 받았건 받지 않았건 관계없이 찜찜함의 먹구름이 덮이기 시작한다.
스피노자는 ‘혐오’를 ‘우연히 슬픔의 원인이 되는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으로 정의한다. 당연히 우리는 ‘슬픔’ 을 제거하려고 한다. 그들의 존재에 불편한 마음이 드는 이유다. 그들의 불행에 감정적 자극이라도 되는 부분이 있었다면 ‘동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감정적 교감을 느끼기에 스치는 순간은 너무나 짧다(얼굴을 알고 있는 누군가가 내미는 것이었다면, 그리고 그에게 긍정적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면 0.1초의 망설임 없이 전단지를 잡을 것이다).
“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할 수는 없냐고?”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자기는 내 어디가 좋아?’라고 묻는 애인의 물음이 사라지는 순간까지 쭉 그렇게 믿을 것이다. 그러나 전단지를 내미는 그들이 ‘나를 사랑한다’ 거나 최소한 ‘나를 배려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증거는 없다. 받지 않으면 심지어 당당하게 짜증을 내는 분들도 꽤 있고, 그럴수록 우리는 고개를 돌리게 된다. 눈을 맞추고, 누군가의 말에 반응할 때만 우리는 누군가를 존중하는 것이고 사랑을 표현하는 것임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상충되는, 게다가 꽤 힘의 균형도 맞는 두 가지 욕망을 함께 품으며 살아간다. 예를 들어 “다이어트’와 “야식” 같은 것이 그것이다. 두 가지는 양립 불가능한 욕망이다. “다이어트”가 ‘이상적이고 잘 구현된 현실’ 을 욕망하는 것이라면 “야식”은 ‘지금 당장의 쾌락과 필요’에 가깝다. “다이어트”가 ‘우리의 도덕률’ 같은 것이라면 “야식”은 본능적 쾌락이다.
혐오감이 드는 그들이 내미는 전단지를 기꺼이 받아 들기도(귀찮고 싶지 않은 내 욕망), 외면하기도(그들을 사랑하여야 한다는 도덕률) 어려운 이유는 내 마음속에 자리 잡은 두 가지 상충되는 욕망 때문이다. 그리고 뜨겁게 맞부딪힌 욕망의 잔재들이 죄의식이 되어 내 마음에 내린다.
근본적으로 그분들이 그곳에 선 이유는 그것 외에 마땅한 생계가 없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송파 세 모녀 자살 사건’처럼 현재의 복지 제도로 취약 계층을 감당하기에는 구멍이 너무 크다.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그의 책 <노동의 배신>에서 사회 하층을 이루고 있는 노동자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의 삶이 힘든 이유는 근면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돈이 없기 때문에 보증금을 낼 수 없어 비싼 일일 숙박비를 지불하며 모텔을 전전해야 하고, 집이 없으니 조리도구도 없어 모든 음식을 사 먹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 탓이 아니다. 그들은 너무나 근면했지만(저자가 육체적으로 감당하지 못할 정도라고 토로했듯) 사회적 구조에 의해 가난의 굴레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라고 저자는 분석한다.
그러니 일단 혐오의 마음을 거두고 볼 일이다. 그들이 내미는 전단지를 받아도 좋고, 받지 않아도 죄의식 같은 것은 느끼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 시간, 그곳에 서 있을 수밖에 없게 한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한번 생각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리고 가능할 때 행동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고……
버트런트 러셀은 “정의로운 세상이라면 ‘자선’따위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이미 1930년대에 말했다. 그 지점에서 우리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오늘 지하철 입구에서 누군가가 내미는 전단지… 어떻게 하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