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해가 떠 있는 시간,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반딧불을 보기 위해 이동했다. 해가 막 넘어가려 할 즈음, 그러나 주위에 아직 빛이 남아 있는 시간에 투어가 시작되었다.
언제부터 사용한 것인지 모를 낡고 냄새나는 구명조끼를 받아 입고 선착장으로 나갔다.
“이 근처는 맹그로브 군락지입니다. 맹그로브는 열대나 아열대 강이나 진흙바닥, 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서 사는 나무들이에요. 오늘 보실 반딧불들은 맹그로브 숲에서만 사는 녀석들입니다. 환하고 반짝이는 것이 마치 크리스마스트리 같습니다만 그 숲에 사는 곤충이 반딧불만 있는 것은 아니겠죠? 모기도 무척 많습니다. 한국에서 가져온 약을 뿌리신 분들도 현지 모기 기피제를 더 뿌리셔야 예방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반딧불 투어 전에 먹은 저녁 식사. 칠리 크랩 소스에 적신 튀긴 빵이 최고였다는.......
모기 기피제를 잔뜩 뿌린 후 30여 명이 탈 수 있는 모터보트에 탑승했다. 저녁 놀이 지는 것을 뒤로하고 달리던 배가 속도를 늦췄다.
“와, 저기, 저기.”
누군가 탄성을 질렀다. 어슴푸레한 저녁 빛을 배경으로 작고 반짝이는 빛이 보였다. 사진으로 담기에도 너무 작은 빛이다.
“크리스마스트리라는 것은 좀 과장인걸? 그래도 예쁘긴 하다.”
일행이 소리를 낮춰 중얼거렸다. 어느새 보트가 멈췄다.
조용해진 배 밖으로 작고 반짝이는 것들이 날아다녔다. 손을 내밀면 내려앉는 것들도, 멈춰 선 보트의 난간에 머무는 것들도 있다. 누군가가 손바닥 위에 내려앉은 반딧불을 옆 사람의 손 위로 넘겨주었다. 잠시 죽은 듯 멈춰 있던 반딧불은 곧 날아올라 사라졌다. 근처에 떠 있는 다른 배에서도 탄성 소리가 들렸다. 이제 해는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모터 엔진이 요란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가이드가 말했다.
“자, 반딧불을 보는 일이 관광이라면, 블루티어스를 보는 일은 운동입니다. 이제부터 채를 나눠드릴 텐데 배가 멈추면 노를 젓는 것처럼 막 움직이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안 보여요. 막 움직이면 채 안에서 블루티어스를 볼 수 있을 겁니다.”
배는 맹그로브 숲을 벗어나 천천히 바다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요란한 모터의 굉음과 함께 배가 달리시 시작했다. 5분쯤 달렸을까, 배가 속력을 줄였다.
“자, 이제 휘저어요.”
블루티어스라는 이름은 아름답고 낭만적이지만 이 녀석의 정체는 와편모충(dinoflagellates)이라는 원생생물이다. 이따금 우리나라 강과 바다에서 녹조와 적조를 일으키는 녀석들과 친척관계다. 어떤 것은 야광이라는 이유로 일부러 찾아와 볼 정도로 인기가 있고, 어떤 녀석들은 애물단지로 취급된다. 이래서 인생은 불공평한 것이다.
사진에 찍힌 반딧불과 블루티어스. 그냥 보는 것이 사진보다 99배 정도 아름답다.
계속 노를 젓듯 손을 휘저어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쉽게 지쳤다. 가이드가 채를 수거해 간 후 보트가 요란한 굉음과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배 밖으로 물보라가 만들어질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갑자기 배가 커다랗게 원을 돌았다. 마치 넓은 채로 물속을 휘저은 것처럼 푸른 형광색 바다가 넓게 펼쳐졌다.
“이건 드라이버의 서비스예요. 오전에 내린 비 때문에 오늘은 블루 티어스가 물 표면으로 많이 올라와 있어서 이런 볼거리가 가능합니다. 여러분은 운이 좋은 거예요.”
가이드의 말을 끝으로 배가 천천히 속도를 늦추고 선착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가이드는 한 달에 몇 번씩 이곳을 찾겠지만 이 배 안에 있는 관광객의 대부분은 오늘이 이곳에 오는 마지막일 것이다. 그렇다면 '때문에 휘청이며 계단을 오르내렸던 기억'을 남게 하기보다는 ‘비 때문에 즐겁게 반딧불이나 블루티어스를 봤다'는 기억을 심어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운이란 마음먹기 달린 것인지도 모른다. ‘좋다’고 믿으면 ‘좋은 기억’으로 남는 법이다. 이렇게 나는 절반은 사기 같고 절반은 응원 같은 가이드의 말을 곱씹었다.
“이제 세랑고르주를 떠나 쿠알라룸푸르로 갑니다. 쌍둥이 빌딩이 있는 시내 야경을 구경하시고 숙소로 복귀하실 겁니다. 오늘 피곤하다고 숙소에 가셔서 그냥 주무시면 내일부터 엄청난 두드러기가 생길 수도 있어요. 모기 기피제 깨끗이 씻으시고요, 제가 말씀 안 드려도 아시겠지만 아까 입은 구명조끼에서 이상한 냄새났었죠? 여러분 몸에서도 날 겁니다. 이제.”
차가 어두운 시골길을 달리기 시작하자 가이드가 남은 여정을 설명했다. 피곤한 관광객들은 대답 없이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고 있었다. 도착하면 깨워주겠다는 말을 끝으로 가이드의 마이크가 꺼졌다. 차는 왕복 4차선의 도로를 지나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10시가 다 된 시간이라 교통 체증은 심하지 않았다. 멀리 트윈 타워의 밝은 빛이 보일 때쯤 가이드의 말이 이어졌다.
쿠알라룸푸르의 랜드마크 쌍둥이 빌딩.
“저기 쌍둥이 빌딩 보이시죠? 말레이시아 국영 석유 회사 페트로나스 사의 사옥인데요, 저 건물 중 하나를 한국 기업이 지은 것은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착공 당시 타워 한 개는 일본 기업인 하자마 건설이 짓는 것으로 먼저 결정했어요. 나머지 타워를 입찰하면서 말레이시아 정부가 머리를 씁니다. 어떻게 하면 건물을 더 빠르고 안전하게 지을 수 있을까? 말레이시아 정부는 나머지 타워 하나를 삼성물산에게 짓게 합니다. 일본과 한국의 관계를 볼 때 기를 쓰고 경쟁할 것을 알고 있었던 거죠. 그러면서 당근을 겁니다. 둘 중 빨리 짓는 나라가 타워 사이 다리를 지을 수 있도록 해 주겠다. 자, 일본이 먼저 공사를 시작했죠? 당연히 삼성이 늦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삼성이 새로운 공법을 도입합니다. 쭉쭉 치고 나갑니다. 이런 일에서 지면 한국인이 아닙니다, 그렇죠? 결국 삼성이 빨리 완공해서 두 타워를 잇는 브리지는 한국의 극동 건설이 짓게 됩니다. 물론 브리지를 연결하는 기술은 해외에서 수입했지만 아무튼 한국 기업이 지은 거예요.”
밤늦은 시간이지만 거리에는 많은 관광객이 있었다. 위험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말레이시아는 자국의 건물을 지으면서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를 이용했다고 한다. 적어도 일본과 우리나라 사이에 어떤 역사가 가로지르는지 알았다는 말이다. 말레이시아는 자신들과 상관없는 그 역사를 이용해 원하는 바를 이뤘다. 어쩌면 이것이 타국의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 중의 하나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말레이시아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을까? 동남아 관광은 많이 떠나지만 동남아의 역사에 대해서는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을까? 궁금해지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