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숭이보다 멋지게 사는 법
2003년 네이처에 실린 ‘카푸친 원숭이 실험’이란 것이 있다. 영장류를 연구하는 프란스 드발과 세라 브러스넌이 카푸친 원숭이를 대상으로 한 ‘공정성’실험이다(이 논문의 제목은 ‘원숭이들이 불평등한 보수를 거부하다(Monkeys reject unequal pay)’이다).
방법은 이렇다. 나란한 두 개의 우리에 넣은 카푸친 원숭이에게 같은 과제를 수행하게 하고, 완수하면 오이와 포도를 보상으로 준다. 두 개의 우리이지만 붙어 있고, 투명하기 때문에 원숭이들은 서로 어떤 보상을 받는지 확인할 수 있다.
두 마리 모두에게 오이를 줄 때, 이들은 평화롭게 보상을 받아들인다. 보상이라고 하기에 썩 훌륭한 음식은 아니지만, 두 마리의 원숭이는 만족하게 실험자가 준 오이를 받아먹는다.
그러나 같은 과제를 수행했음에도 한 마리에게는 오이를, 다른 한 마리에게는 포도를 주게 되면 다른 결과가 관측된다. 다른 원숭이에게는 포도를 주고, 자신은 계속 오이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원숭이는 그때까지 잘 받아먹던 오이를 거부한다. 심지어 실험자에게 오이를 던지고, 우리를 두드리며 격앙된 반응을 보인다.
어제 후배의 하소연을 들으며 이 실험이 떠올랐다. 후배는 지금 비정규직으로 입사한 지 두 달째였다. 2년 후 정규직 전환이 가능해서, 입사할 때는 비교적 만족한 상태였지만 지금은 이직을 고민 중이라고 했다.
“내가 이 회사를 그만두면 그건 전부 빵 때문이에요.”
퇴근을 못할 정도로 잔업이 많은 것도 아니고,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정도의 숙련도를 요구하는 일도 아니었다. 기술직이어서 함께 일하는 정규직과 하는 일이 다르지도 않다. 이전 회사에서 경력도 있어서 일 자체는 차라리 쉽다. 문제는 빵이었다.
식사 외에 간식으로 빵과 음료가 제공된다고 했다. 대단한 베이커리에서 명성이 자자한 파티쉐가 구워 내는 특별한 빵이 아니고, 마트에서 묶음으로 살 수 있는 비닐에 담긴 빵과 우유나 두유 같은 음료라고 했다. 서너 시쯤 되면 직원들은 하던 작업을 멈추고 사무실에 앉아 빵 봉지를 뜯게 되는데, 이 간식이 ‘정규직’에게만 지급이 된다는 것이다.
박스째 사무실로 배달되는 빵을 처음에는 다른 직원들처럼 먹었다고 했다. 세 번째인가 빵을 집는데, 누군가 ‘그것은 정규직에게만 지급되는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빵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고, 배가 고픈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는 터여서 박스에 담긴 양이 모두 소진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하여간 후배 몫으로 나온 빵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후배가 다시는 빵이 든 박스에 손을 뻗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사무실 사람들 중 누구도 간식을 먹으면서 후배에게 먹어보라고 권하거나 혹은 먹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은 없었다고 했다.
“얼마 전에 초코파이랑 두유를 사다 놨지 않겠어? 어느 날 남들 빵 먹고 있을 때 그걸 먹었는데, 옆 사람이 뜬금없이 ‘아, 그건 다른 거네? 어디서 났어요?’ 이러더라. 그전에 자기들끼리만 먹고 있을 때는 아는 척 한 번을 안 하더니, ‘그건 다른 거네?’ 나 원, 나 이런 사람들이랑 일 해야 해요? 정직원 되어도 이런 사람들이랑 일 못하겠어, 난. 내가 그만 두면 다 빵 때문이라니까.”
원숭이가 포도 혹은 오이를 받아먹은 이유는 전적으로 실험자의 변덕 때문이다. 모두에게 오이를 주던지, 포도를 주었다면 아무런 갈등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험자가 갈등을 일으킬 요량으로 원숭이에게 변덕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 문제다. 심지어 실험자의 변덕에 적응이 된 나머지, 포도를 먹는 원숭이가 오이를 먹는 원숭이에게 심리적 우월감을 느끼기 시작했다면, 이것은 더 큰 문제다.
‘실업은 사회적 문제이며 개인적 무능의 문제만은 아니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누군가는 직장을 얻지 못한, 안정된 밥벌이를 갖지 못한 사람들을 욕보인다. 그들의 ‘실업’이, ‘비정규직’이 그들의 노력 부족이고, 자질 부족이라는 논리를 밑바닥에 깐 채 자신들의 ‘정규직’을 누린다.
안정적인 직장이 많았을 시절에 ‘실업’ 상태나 ‘취준생’의 신분은 자신의 노력만으로도 극복될 수 있는 시련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수십,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사회로 쏟아져 나오자마자 ‘실업’이나 ‘비정규직’의 상태와 마주하게 된다. 지금과 같은 사회에서 ‘실업’이나 ‘비정규직’은 개인의 노력과는 별개로 누구나 겪을 가능성이 있는 공통의 불운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지금 혹시 내가 그런 불운 가운데 있지 않다고 해서, 다른 이의 불운을 바라보며 자신들의 상태에 위안을 느낄 여지는 거의 없다.
‘카푸친 원숭이 실험’ 을 진행한 프란스 드발은 “일부 원숭이는 동료가 포도를 받지 못하면 자기도 포도를 거부하는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라고 덧붙였다. 이런 인식은 인류와 침팬지의 조상이 갈라지기 훨씬 전부터 뇌에 입력되어 있으며, 신경학적 증거로도 입증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공정함, 정의감, 평등 같은 것을 생각할 때 무엇을 떠올려야 할까. 적어도 원숭이보다는 나은 삶을 선택하자고 하면 너무 나간 주장이 될까? 실험자의 계획에 휘말려 같은 원숭이끼리의 동료애를 잊는 것보다는 점잖게 '포도 정도는 거부하자'고 말하면, 너무 배부른 말이 될까? 신입직원을 뽑는 회사의 수는 더 줄어든다는데, 비정규직의 숫자는 늘어난다는데, 원숭이보다 나아지고 싶다는 욕망조차 너무 원대한 것이 되어 버릴까 두려운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