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살고 있다고 단단히 착각하는 일수 아지매
그 후 우리는 부산으로 이사했다.
르망이 들어온 건, 그 해 가을쯤이었다.
부산으로 이사한 지 몇 달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남편은 완주에서보다 훨씬 바빠졌다.
전화기는 끊임없이 울렸고, 그는 늘 공사장에 있었다.
인부 열 명을 거느린 십장이 되었다고 했다.
그가 "내 밑에 사람 열 명 있어"라고 말했을 때,
나는 왠지 그 옆에 서 있는 것처럼 어깨가 펴졌다.
남편이 부산에서 자리를 잡아가던 어느 날이었다.
남편이 집 앞에 까만색 ‘르망’을 끌고 왔다.
주인집에도 자가용은 없었는데,
그날은 우리 가족에게도 차가 생긴 첫날이었다.
차 문이 ‘철컥’ 열리고, 햇빛을 받은 차체가 번쩍 빛났다.
그 광택에,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주인집 창문이 조금 열렸고, 아이들의 머리통이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괜히 트렁크 문을 열고 닫아보았다. 괜히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나는 뒷좌석에 아이들을 태우고, 그 옆에 살며시 앉았다.
“이제 진짜 잘 사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차 안의 고요는 바깥의 환호와 달리 낯설었다.
새 차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그 냄새에서는 알 수 없는 공허함을 느꼈다.
그 르망이 무얼 의미하는 건지...
기쁨은 짧았고, 어딘가 모르게 낯설었다.
심장이 뛰는데, 어째서인지 마음이 불안했다.
그때는 정말 몰랐다.
어쩌면 그 모든 건
한순간 반짝였다가 사라질 ‘잠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반짝임이 얼마나 덧없을지...
그때부터 살림이 피기 시작했다.
거실 소파옆에는 유행하던 돌이 들어간 정수기가 놓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물을 따르며, 그 맑고 투명한 물줄기를 바라보았다.
그 물을 마시는 순간만큼은, 나도 깨끗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지난 날들, 지하방의 눅눅한 공기와 눕기 무서웠던 이불이 떠올랐다.
그 기억을 잊고 싶어, 물을 천천히 또 한 잔 마셨다.
한편에 쌓아둔 만 원짜리 다발을 꺼내, 고무줄을 풀고 한 장 한 장 넘겼다.
습한 감촉, 오래 묵은 잉크 냄새.
지하방에서 하루 벌어 하루 먹던 시절이 떠올랐다.
“사람이 왜 돈에 미치는지 알겠네.”
입 안에서 나온 말은 의외로 부드러웠다.
돈은 확실히 나를 안심시켰다.
위로는커녕, 뿌듯함도 아니었다.
그저 두려움을 덜어주는 감각.
바닥난 통장 대신 현금이 손에 쥐어지는 이 안도감.
모임 날이면 누구보다 도착해 앉아 있었다.
늦게 오는 사람에게는
“내가 시간 본다잖아.”하고 으름장도 놓았다.
그날따라 옷깃을 한 번 더 여미고, 거울 앞 립스틱을 고쳐 발랐다.
골목을 걷다 마주친 이웃 아주머니가 슬쩍 내 옷차림을 훑어보던 눈빛.
예전엔 관심조차 없던 사람들이 이제는 인사를 먼저 건넸다.
그 순간, 정말 내가 조금은 달라진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때의 나는 분명,
누구보다도 ‘제대로’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 날,
남편이 담배를 물고 말했다.
“여보, 당신도 돈 좀 굴려볼래?
시장에 일수 좀 놓아봐.
요즘 그거 알짜야.”
나는 두 말 않고 그러자고 했다.
말투는 무심했지만, 나는 그 말에서 처음으로 '필요한 사람'이 된 기분을 느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치 나도 이 집의 어엿한 일원이 된 것 같았다.
다음날부터 50cc 뽈뽈이. '택트'를 타고 시장 골목을 누볐다.
기름 냄새가 묻은 바람이 뺨을 스쳤고, 골목 안쪽에서 국밥 냄새가 피어올랐다.
기름 냄새, 국밥 냄새, 고등어 굽는 연기,
아주머니들은 나를 보고 눈을 찡그리거나 고개를 끄덕였다.
일수를 돌다 보면, 늘 그 자리에 있던 얼굴들이 익숙해졌다.
골목 입구의 국밥집 아주머니, 잡화점 옆 미용실 언니, 그리고 고등어 굽는 할머니까지.
모두가 날 알아보았고, 나도 그들 속에서 안정을 느꼈다
“일수 아주머니 왔네~” 누군가 그렇게 불러주면,
나는 어깨를 쓱 펴고,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대꾸했다.
나는 그 순간, 살아 있었다.
기타 줄을 튕기던 손끝은
이제 지폐를 넘기고 도장을 찍는 데 더 익숙했다.
장을 펴고 앉은 아주머니들에게 목소리엔 힘을 주고는
"2부 이자"이라 말하며
일수수첩에 도장을 찍을 때면
내 손끝에서 ‘권위’ 같은 게 생기는 기분이었다..
누군가는 거칠게 지폐를 건넸고, 또 다른 이는 양손을 모아 건넸다.
그 안에 있는 차이마저도 나를 움직이게 했다.
돈을 걷으며 문득,
'받는 손보다 건네는 손이 낫는구나.'
그게 그렇게 뿌듯하고, 또 위험했다.
지금 나는 세상 속, 한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었고,
돈을 주고받는 그 순간순간마다,
도장이 찍히듯 무언가가 내 안에 새겨지는 것 같았다.
내가 오늘을 잘 살아냈다는 표시를 남기는 기분.
그 땀 묻은 지폐 한 장 한 장은, 나를 어제와 다르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사람들 사이에서 이름을 불리고 "언니"라 불리며 대단한 사람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그 느낌은 마치 환각처럼 나를 중독시켰다.
그러다 문득, 누가 날 ‘일수 아주머니’라 불렀던 날,
기분이 좋아야 할 그 순간에, 이유 없이 눈물이 핑 돌았다.
이유는 몰랐다.
갑자기 그 이름이 낯설게 느껴졌다.
' 나는 정말 잘살고 있는 걸까...? '
그 순간, 왁자지껄한 시장 골목의 소음이 다시 귀를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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