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회사였다. 워크숍에서 악수를 나눈 뒤로 왠지 그의 자리를 끼고 코너링을 해야 하는 그 쯤에서는 발걸음이 더 빨라졌다. 이윽고 군대문화로 유명한 남초팀으로 팀을 옮기게 되며 이 남자와는 1미터가 채 안 되는 거리를 두고 등을 맞대는 사이가 됐다. 밤잠을 필수로 설치며 일해야 하는 극한 환경 속에서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고마운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을 무렵 어느 날은 퇴근길에 서로가 좋아할 만한 음악을 공유하기도 했는데 같이 걷는 길은 언제나 짧았다. 바로 집 가는 버스를 타러 가기에는 대화가 너무 재미있었기에 아쉬운 날은 서브웨이에 들러 저녁식사 하는 시간이 생기기도 했다. 그렇게 서서히 스며들 수 있었다.
나를 놀리는 재미로 사는 것 같은 그가 번개로 갑자기 만나자는 말을 한 것도, 밖에서 따로 처음 놀려고 둘만 만난 것도 처음이던 어느 늦여름이었다. 우린 함께 독립영화를 즐겁게 보고 있었는데, 사귀지도 않는 사이인데 그날따라 왠지 모르게 자꾸 어깨에 기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살면서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기에 속으로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내가 왜 이러지? 좋아하나? 이러다 회사생활이 앞으로 어색해질 수도 있어. 설령 내게 마음이 있다 해도 이런 식이라면 당황할 거야. 우린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침착하자' 컴컴한 영화관에서 나의 마음은 어느새 은밀하게 요동치며 반응하고 있었다. 기억에 남는 두근거림의 시작이었다.
애당초 마음이 생기기 전부터 둘은 절대 사귀면 안 된다며 으름장을 놓던 상사들 눈밖에 나고 싶지 않았음을 합의하고 시작한 사내비밀연애. 다른 직원들이 소개팅을 시켜준다고 하면 적절히 둘러대야 하지를 않나, 여초팀과 하하 호호하는 모습에 질투 어린 눈길을 애써 두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퇴근 후 저녁 한 끼 하려면 근방을 벗어나기 위해 먼 정류장을 향해 따로따로 걸어가야 하는 일들은 꽤나 수고스러운 일이었음에도 누군가가 우리를 봤다느니 하는 소문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었다. 세상은 좁고 말은 많았다. 은밀한 사내연애란 생각보다 더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니 자신하지 않는 것이 좋다.
웃음포인트가 통하는 것, 좋아하는 것이 같은 것, 경우 없는 사람을 싫어한다거나 하는 부분들이 겹치는 것들도 물론 다 좋지만, 양쪽이 심각한 평화주의자로서 싸우지 않아도 대화가 가능한 사람과 만난 것은 특히 행운이었다. (상대방 쪽이 조금 더 마음이 넓다고 언제나 생각하고 있다)
비 온 뒤 땅이 굳는다는 말이 있듯 싸우면서 돈독해지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 나는 연인과 감정이 상하는 싸움이라면 정이 떨어지는 스타일이었다. 특별한 이상형 조건은 생각하지 않아도 다른 친구들처럼 자주, 심하게 다툴 정도로 맞지 않는 사람과는 만날 수 없겠다고 언제나 생각하고 있었다.
오래 만나면서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믿지 않는다. 자랑이 되지는 않는 것이 싸우지 않으면 골이 깊어지고 불건강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니 뭐가 옳다고 할 수는 없다.
대화가 되는 사람이란 아마도 그 대화를 하면서 점점 감정이 상하고 싸우게 되는 게 아니라, 한 템포 감정을 쉬어가며 이해하게 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려면 그 표현방식들이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궁금증에서 시작해야 한다. '나는 이러한 감정과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너는 어떤 것 같은지' 상대의 감정과 생각을 진심으로 궁금해하고 생각해 보려는 자세가 서로의 다름을 배울 수 있고, 자신의 오류가 있다면 그것 또한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생각의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면 강요하지 않고 조금씩 양보를 할 마음을 가지고 대화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 이제 어떻게 하자'라는 룰을 세우거나 약속을 하지 않더라도 괜찮다. 매 순간 서로에게 고마운 진심을 담은 각자의 언어로 표현하다 보면 그것이 쌓여 점점 좋은 하루가 되고 관계가 되는 것을 느낀다. 작은 부분마다 감사의 표현을 한다는 게 오히려 감동에 무뎌지는 일 아닌가 싶지만, 그 말들을 매일 고아 우려낸 맛은 풍성해져 어디서도 맛보지 못하는 우리만의 진국이 된다.
나는 날것으로 들어가 있는 게 가장 자연스러운 뜨끈한 온탕에 들어와 있다. 한때는 이름 모를 타인에게서, 가족과 스스로에게까지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적도 있었다. 거대한 인력시장 같은 사회에서 단점은 철저하게 가려야 하고 꾸미기 위해 기민하게 깨어있어야 한다 믿었다. 편안하게 몸을 녹이고 있다 보니 그간의 예민함은 때처럼 벗겨지고 찔 줄 모르던 살은 보기 좋게 불어났다.
캠코더 앞에서 깨방정을 떨던 해맑은 어린이의 모습이 30넘은 나에게서 문득문득 드러날 때가 잦아지고 있다. '할머니가 돼도 이런 맑은 모습으로 살게 하고 싶다'는 말을 해줬으니 나는 한없이 철없는 환갑과 칠순을 거친 파파할머니의 모습으로도 여전히 당신을 웃게 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