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중 떡볶이
내내 무슨 말을 할지 알면서도 보게 되는 최고의 건강(먹방) 프로그램인 생로병사에서조차 아무리 가짜 배고픔에 대해 설파하며 먹고 싶은 음식이 떠오르면 물을 마시라고 강조하지만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듯 자신이 좋아하는 맛이 주는 힘은 때론 생에 의지까지도 견인할 원동력이 될 수도 있을 정도로 실은 중요한 욕구가 아닐까 싶다.
'도르마무, 거래를 하러 왔다'
닥터 스트레인지에서의 무한루프 도르마무씬처럼 내게도 반복적으로 돌아와 말을 거는 음식들이 있다. 이것은 언제나 사라지는 법이 없고 항상성을 유지하며 주기적으로 돌아온다. 기막히고도 끈질긴 이 미스터리 현상을 파악한 짝꿍은 진지하게 삼위일체로 일컬어 부를 때도 있지만 그건 신성모독 같으니 '삼대 소울푸드'라 칭해보겠다.
라면
피자
그리고 떡볶이...!
떡볶이 안 좋아하는 사람이 잘 없는 것 같다. 다들 어릴 때 향수 하나씩은 있어서일까? 학원 앞에서 먹던 컵볶이 맛은 얼마나 먹어댔으면 아직도 입맛을 다실 때마다 생생하고, 동기와 나눠먹은 공강시간 속 디델리의 참치김밥과 과일이 첨가된 소스가 버무려진 그것. 그러니까 인생을 쫙 펼쳐놓은 수평선을 자세히 확대해 보면 떡볶이라는 음식은 꽤 자잘하고 촘촘하게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아차산, 대치동 은마상가, 강릉 여고시절, 정자동 느티분식 등 많은 떡볶이 집을 가보았지만, 맛집 고수들에 비하면 한참 멀었다. sns에는 떡볶이 맛집만 찾아다니며 후기를 공유하는 아주 열정적인 사람들도 많이 보이고 동호회도 있다는 걸 안다. 그 정도로 찾아다닐 여력과 체력은 되지 않지만 언제 어디에서 만날지 모르니 네이버지도의 지역마다 유명 떡볶이 집은 하나씩 즐겨찾기에 저장해서 이 가슴속에만은 품고 다니는 리스트가 있음에 만족한다. 덕후라기엔 어쩐지 심심하고 밋밋한 듯 보이지만 어쨌든, 못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떡볶이를 열렬히 흠모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살만 찌고 영양가 없는 음식의 최고봉' 같은 내용으로 심심하면 재업로드 되는 기사들을 보고 있자면 하면 안 되는 사랑을 하고 있는 듯 하긴 하지만...
이십 년 전 신당동 떡볶이가 핫플레이스였다면 언젠가부터 레스토랑 분위기가 제법 나는 떡볶이 가게들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궁중떡볶이와 짜장떡볶이를 특식으로 여기며 '우와'하던 때를 지나 이제는 로제와 마라, 바질과 미트소스를 얹은 요리로 거듭난 지 오래다. 그래도 여전한 맛을 가진 학교 앞 분식집의 컵볶이나 장터의 떡볶이가 계속 원조의 맛을 잊지 못하게 했으면 좋겠다. 요새 풀빵 파는 곳 찾기가 점점 어려워지듯 심플한 떡볶이를 언젠가 보기 어려워지려나 괜히 서운하지만 집에서 마음먹으면 만들 수 있는 음식이라는 점은 다행이다.
요새 잘 나오는 밀키트도 두끼에 가는 것도 모두 좋지만, 나 또한 집에서 만드는 것을 여전히 선호하는 편이다. 떡볶이 하나 먹고 싶다고 만원이 넘게 주문해야 할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여기서 잠시 생활의 발견!
집에서 해 먹어보고 싶은데 소스 맛을 잡는 게 영 자신이 없다면 자주 먹던 떡볶이 밀키트의 뒷면을 한번 살펴보는 것을 추천한다. 재료에 쓰여있는 순서대로 들어간 양의 순서를 의미하니 똑같은 재료가 아니더라도 있는 재료로도 달달함과 매콤함, msg의 조합을 어림잡아 따라 넣다 보면 밖에서 파는 자극적인 맛이 된다. 김풍작가의 말처럼 우리 가족에게 안 먹인다고 생각하고 만들어야 불건강하고도 맛있는 맛을 만들 수 있으니 기왕 밖의 음식처럼 만들 거라면 죄책감 가지지 말자. 애초부터 건강 영역에서의 떡볶이는 점수를 얻을 수 없는 녀석임을 잊지 말자. 박사님들 제로 떡볶이 만들어주세요.
(지인은 아예 떡볶이 소스 가루 타입을 사두고 편하게 만든다고 하던데 아직 시도해보지는 못했다)
스스로 만들어 먹으면 좋은 점은 당연히 자기 마음대로 재료와 양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내 레시피에 꼭 들어가는 재료는 아이러니하게도 어묵이다. 소신발언 하나 하자면 어묵 없는 떡볶이는 이상하게 떡볶이란 말이 무색한 느낌이다. '야 차라리 어묵볶이나 당면볶이를 좋아한다고 해라!'라고 진정한 떡볶이 마니아가 외친다면 난 '그래요 당신 말도 맞아요' 하면서도 국물이 떡에 잘 스며들기란 참 어렵다는 핑계만큼은 읊조리고 싶다. 간단하지만 맛있게 먹고 싶은 음식인데 떡에서 깊고 쫄깃한 맛을 살리기 위해서는 조리법과 시간에 공을 들여야 한다. 특히나 퉁퉁한 쌀떡이라면 그 난이도는 한층 더 높아진다. 이런 연유로 떡볶이에 들어있는 떡보다도(떡 자체가 사기인 치즈떡은 예외로 하겠다) 매콤 달콤 국물이 아깝지 않도록 쏙쏙 잘 밴 어묵이나 당면에 조금 더 손이 간다. 별다른 노력 없이도 어묵의 맛은 보장되며 오히려 초반에 넣으면 소스 맛을 진하게 살려주는 킥이 되어주기도 하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참고로 어묵은 밀가루가 들어있지 않아 건강을 조금 챙기는 기분을 낼 수 있는 고래사의 어묵을 즐겨 찾는다.
평생 먹는 것에 걱정 없는 사람도 물론 있겠지만 누군가는 평생을 아무거나 잘 먹다가도 아파져서 식단을 확 바꾸는 경우도 있고, 대부분 나이가 들며 위장장애가 오고 못 먹게 되는 음식이 많아지는 건 자연의 섭리일 테다. 유약하게 태어났지만 아직까지 위대장 내시경 한번 못 해본 나의 위장에게 잠시나마 주어진 자유로운 시간은 과연 얼마나 남아있을지 상상해 본다.
언젠가 하얀 떡볶이조차 소화 안 되는 날이 올까 싶어 남은 시간 중 가장 쌩쌩할 오늘도 열심히 삼색빛깔 영혼의 음식들의 손을 잡고 강강술래 시켜본다. 뭐, 취향은 변하니까 나중에는 '비빔밥, 콥샐러드, 포케'가 될 수도 있으니 미리 너무 좌절할 필요는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