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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 May 18. 2024

장기판을 없애지 말아 주세요

#11번째 단상 - 추억에 대하여


오후 6시. 딱히 특별한 일이 없으면 집 앞 천으로 나간다. 노을이 지는 광경을 바라보며 기지개를 쫘악 펴고, 신발끈을 단단히 묶는다. 이어폰을 꽂고, 최대한 시끄러워 보이는 플레이리스트를 누른 뒤 천천히 뛴다. 오늘 하루도 차암 수고 많았다.


내가 트랙이 아닌 천을 뛰는 이유는 아름다운 물줄기 소리와 황새들을 찾기 위함도 있지만, 이보다 더 반가운 장면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 장면은 바로 천 중앙에 놓인 장기판에서 어르신들이 장기를 두는 모습이다.


더위를 피할 수 있는 다리그늘 아래 일렬로 쫘악 배치된 4개의 테이블. 그곳에서 어르신들은 항상 같은 시간에 항상 같은 모습으로 장기를 두신다. 뛰고 있느라 그 장면을 보는 순간은 단 몇초에 불과하지만, 세 달째 보다 보면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어제는 다른 분이랑 두셨던 것 같은데. 오늘은 장기를 두지 않으시고 훈수만 두시는군. 과연, 오늘은 이기셨을까? 하루하루 내적 친밀감이 쌓여만 간다.




스마트폰이 아직 세상에 등장하기 이전, 나는 꽤 장기를 좋아했다. 명절 때마다 올라오시는 할아버지는 내게 장기를 가르쳐주셨고, 재미가 붙은 나는 명절날만을 기다리며 혼자 장기를 두었다. 물론 할아버지와의 장기에서 단 한 번도 이긴 적은 없다. 그래도 나는 장기가 좋았다. 할아버지와 함께하는 그 시간이 너무 좋았다.


한 번은 내가 계속 지기만 하니까 아빠가 옆에서 거들었다.


“차(車)가 아니라 상(象)을 먹었어야지. 차라고 무조건 먹어야 하는 건 아니야.”


전례 없던 아버지의 훈수에 할아버지는 피식 웃으셨고, 할아버지의 의도 없는 도발에 아빠는 걸려들어 결국 부자간의 장기가 펼쳐졌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장기대결이었다.


나이가 많으면 무조건 장기를 잘 둘 것이라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 나는 이 세상에서 할아버지가 가장 장기를 잘 두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두뇌회전이 빠른 아버지라 하더라도 세월의 노련함은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졌다. 충격이었다.


아, 미리 말하지 않았던가. 당시 우리 아버지는 자택에서 근무했었고 시간이 남을 때마다 컴퓨터로 온라인 장기를 두었다.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 높은 숫자와 함께 ‘단’이라는 계급이었던 것 같다. 꽤나 실력이 있다는 것이다.


“한 판 더해!”


그때 나는 난생처음으로 할아버지를 귀엽다고 생각했다.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사람을 보고 귀엽다고 느끼는게 실례라는 것 정도는 알았지만, 그 모습은 지금 생각해 봐도 너무나도 귀여웠다.




내게 아버지는 그저 아버지였고, 할아버지는 그저 할아버지였다. 하지만 그 둘이 마주 앉아 장기를 두었던 그 순간, 나는 서로가 부자(父子)지간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서로의 행동을 읽으며 가끔 표정을 슬쩍슬쩍 쳐다보는 그 모습은 온 가족이 둥그런 식탁에 모인 것과는 달랐다. 아, 아들과 아버지의 모습이란 이런 거구나.


이제 우리 집에선 더 이상 장군과 멍군이라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중학교에 들어간 이후 게임기와 만화책에 푹 빠진 나는 할아버지가 오셔도 방 안에서 나올 줄을 몰랐고, 어김없이 찾아온 사춘기에 할아버지와 데면데면한 사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가끔 할아버지가 장기를 두자고 하여도 약속이 있다며 집을 나서거나, 대놓고 재미없다고 말했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서운한 표정을 감추며, 내가 그랬던 것처럼 혼자 장기를 두셨다.


그래서 나는 어르신들이 장기를 두는 그 모습을 좋아하나보다. 그래서 나는 한 손에 막걸리병을 든 채 아이처럼 활짝 웃으시는 그 표정을 보러 가나보다. 그래서 나는 쾌적한 환경 조성을 위해 장기판을 없애겠다는 그 포스터에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을 느끼나보다.


어르신들의 소중한 놀이터가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들이 어르신들의 장기를 두는 모습을 보고 옛 추억을 떠올렸으면 좋겠다.


장기판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미소 짓는 할아버지의 표정을 다시 한번 보고 싶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마주 앉은 그 모습을 다시 한번 보고 싶다. 아무래도 이번 명절에는 할아버지에게 장기 한 판 하자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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