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번째 단상 - 인생에 대하여
“나 요즘 인생의 방향성을 잃었어.”
반년 전 대외활동 프로그램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에게 대뜸 문자를 받았다. 나보다 나이가 두 살 더 어린 그녀는 창업을 준비하고 있다. 프로그램 일정상 많은 얘기를 나누진 못했지만, 창업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무서워 벌벌 떠는 나에게 그녀는 남다른 존재였다.
담담해 보이면서도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그녀의 문자를 보고 나는 바로 답장을 보낼 수 없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아직 사회 전선에 뛰어들지도 않은 미취업 아동에게까지 연락이 닿았을까. 그래도 나름 2년 더 많이 밥그릇을 비웠으니, 조금이라도 그녀에게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해주고 싶었다. 나는 핸드폰 액정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인생의 방향성’에 대해 한참을 고민하다 조심스레 손가락을 움직였다.
“맨날 잃고 맨날 찾는 게 (인생의) 방향이지 뭐.”
최대한 담담하게, 최대한 상처받지 않게, 최대한 위로가 될 수 있게 한다는 말이 고작 이거라니. 전송 버튼을 누르자마자 혹시라도 내 말에 그녀가 더 낙담할까 걱정이 밀려왔다. 그러나 보낸 답장에 후회는 없었다. 내가 생각한 인생의 방향에 대해 진지하고 솔직하게 대답했기 때문이다.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게 인생의 방향이다.’
어디서 멋진 말을 빌려온 건 아니고, 순전히 내 경험이 만든 어록이다. 어젯밤, 나는 자기 전에 분명히 잡지 에디터가 되겠다고 장담했다. 그리고 자고 일어난 오늘 아침, 나의 꿈은 갑자기 출판 편집자로 변했다. 그러다가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 대문짝만하게 걸려있는 포스터를 보면 나는 어느새 카피라이터의 삶을 꿈꾸기 시작한다. 그리고 역시나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 앉아 책을 펼치면 나의 꿈은 작가가 된다.
찾아가기 쉽게 앞쪽과 뒤쪽에만 있으면 좋으련만, 쓸데없이 다채로운 꿈이라는 놈은 이곳저곳 곳곳이 퍼져있다. 그리고 그 꿈을 향한 인생의 방향이라는 변덕스러운 놈은 0.1도만 각도가 틀어져도 목적지가 완전히 달라진다. 이러니 꿈 많은 나 같은 사람은 하루하루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루에도 수십 개의 꿈이 피고 지는 요란한 내 인생이지만, 그래도 다행인 점은 내겐 거대한 이정표가 하나 있다는 것이다. 내 꿈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어느 방향으로 걷든 그 길은 '글을 쓰는 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군가 내게 꿈이 무엇이냐 물을 때 나는 항상 ‘글을 쓰는 사람이 될 거예요’라고 답한다. 다소 모호하고, 불확실해 보이는 대답이지만 덕분에 당차게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대답은 쌓이고 쌓여 나의 꿈을 확실하게 만든다.
사진을 찍고 싶다고 말한 또 다른 친구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랑 같이 프로그램을 할 때 나는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뭔지 항상 생각했어. 근데, 나는 어떻게 해서든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더라고. 표현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어. 그래서 그 수단으로 사진을 선택했어.”
친구는 사진작가 자신의 최종 꿈이 아니라고 했다. 언젠가는 악기를 다뤄 음악으로 자신을 나타내고 싶다고 하였고, 레진 공예 액세서리로 제 생각을 실체로 표현하고 싶다 했으며, 글을 쓰는 너에게 글을 배워 시를 쓰고 싶다고도 말했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기로, 친구는 표현하는 사람이 되기로, 그렇게 우리의 모호한 꿈은 더욱 단단해졌다.
도원결의 뺨치는 뭉클한 다짐 이후 작별 인사를 나누며 친구는 이렇게 덧붙였다.
“지하야 내가 지하철을 타면서 인생을 배웠다. 나는 앞만 보고 계속 지하철을 기다렸는데 알고 보니 뒤편에도 가는 방향이 똑같더라. 어디로 가든 가는 길 정해져 있는 것 같아. 너는 글 쓰는 걸로 (나는 사진으로) 파이팅.”
한 번 타기로 결심한 지하철의 방향을 억지로 바꿀 순 없다. 앞으로 타도, 뒤로 타도 목적지가 같다면 초조해하지 않고 몸을 맡기는 수밖에 없다. 탑승객 하나 없는 텅 빈 지하철이라도 괜찮다. 일단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 언젠가는 내가 바라는 목적지에 도착하겠지. 너도 파이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