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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 May 28. 2024

천천히 걷는 날

#19번째 단상 - 계획에 대하여


어디 보자… 약속 시간이 12시고 가는데 1시간 정도 걸리니까 10시까지는 누워있어도 되겠군. 못해도 10시 20분엔 화장실 들어가고 15분 만에 후딱 씻고 나와서 어젯밤에 미리 정한 옷 입으면… 대충 11시. 딱 맞겠네.


이상은 약속 시간 1시간 전의 내 머릿속 생각들이다. 약속이 있을 때마다 항상 그래왔던 것 같다. 12시에 만나기로 했으면 12시 정각에 정확히 도착하기 위해 머릿속 계산기를 두드리며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갠다. 정해진 시간에 도착하는 지하철에 타기 위해 바닥을 응시하며 뽈뽈뽈 걷는다. 환승할 경우에는 무조건 지도 어플에 표시된 빠른 환승 칸에 서 있고, 에스컬레이터에선 항상 두 계단씩 오르내린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시간은 12시 5분. 이런, 또 늦었다. 분명 계획은 정확했는데 왜 항상 늦는 거야!





나는 MBTI에서 J가 꽤 높은 계획형 인간이다. 매년 성격 유형검사를 할 때마다 J의 비율은 90퍼센트가 넘는다. 물론 10개의 계획 중 9개는 못 지키는 90퍼센트의 어설픈 인간이긴 하지만.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지키지 못할 계획을 짠다. 계획을 짜곤 있지만 사실 계획을 지키고 못 지키고는 중요하지 않다. 내게는 오직 계획의 유무만이 중요하다.


어렸을 때부터 시간이 의미 없게 흘러가는 것을 싫어했다. '학생 때가 가장 좋은 거야.' '다시 20살로 돌아갈 수 있으면 나는 군대도 다시 다녀올 수 있어.' '20대는 뭐든 할 수 있는 나이니까 바쁘게 살아야 해.' 누군가 정의한 청춘이라는 단어에 너무 겁을 먹어서일까. 어느 때보다 지금이 가장 빠르다는 말은 내게 미래에 대한 흥분이 아닌 현재를 잘 소비하지 못한다는 불안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오늘은 평소와는 다른 하루를 살기로 (계획)했다. 약속까지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평소보다 30분 더 일찍 밖으로 나왔다. 평소 걸음걸이의 절반 이하로 속도를 냈다. 그래도 걸음이 너무 빨라 골목길을 한 바퀴 돌았다. 그래도 시간이 남아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래도 시간이 남아 나는 스트레칭을 하고, 런닝하는 아저씨와 눈인사를 하고, 망개떡을 파는 할머니를 쳐다보고, 공원에서 오줌 누는 강아지를 바라보고, 다시 하늘을 올려봤다. 아, 시간이 남는다는 건 꽤나 좋은 일이네.


사실 30분 더 일찍 나왔다고 나쁠 것도 없고, 손해 볼 것도 없다. 집에서 30분 더 누워있어서 달라지는 건 지키지도 못할 계획의 구체성뿐이다. 왠지 모르게 손해 보는 기분. 이 빌어먹을 계산적 사고 때문에 나는 그간 얼마나 많은 유쾌한 방황을 놓쳤는가.


시집을 챙겨 나오길 잘했다. 다음 내용이 궁금하지만 덮어버려야 하는 소설이나, 집중이 필요한 인문학에 비해 시는 천천히 걷기로 한 오늘과 안성맞춤이다. 지하철 개찰구 앞 벤치에 앉아 시집을 펼친다. 몇은 감동적이고, 몇은 심오하다. 또 몇은 읽지 않은 채 멍하니 바라본다. 활자를 따라 눈을 굴려보지만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평소의 그 찝찝한 느낌이 오늘은 기분 좋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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