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번째 단상 - 박탈에 대하여
인스타그램을 지운 지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화면 속 세상이 아닌 눈으로 보이는 세상에서 살기 위해 SNS를 줄였지만, 불행하게도 두 세상 모두 나와 멀어지고 있다. 모두의 시선이 네모난 액정에 고정된 세상에서 진짜 세상은 어쩌면 핸드폰 속 세상이 아닐까. 알몸으로 전쟁터에 나간 기분으로 디지털 디톡스중인 나를 바라본다.
처음 인스타그램을 지웠을 땐 불안함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혹시라도 중요한 미팅 연락이 DM으로 오면 어떡하지? 오랜만에 친구에게 온 연락을 무시한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물론 노트북으로 잠깐잠깐 확인해 본 결과 김칫국 엔딩이 확실했지만, 그럼에도 불안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도태되고 있다는 느낌을 도저히 지울 수 없었다.
SNS와 멀어진 지 대략 한 달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무언가로부터 뒤처진다는 기분을 느낀다. 트렌드와는 동떨어진 20대 아재가 된 기분이고, 친구들과의 대화에서도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디지털 디톡스를 후회하지 않는다. 단 하나의 변화, ‘부럽다’는 말을 내뱉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신빈곤’이라는 키워드가 한국에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시기는 2000년대 초반이다.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생활 수준이 높아져 마치 빈곤이 없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플레이션과 증세, 공공요금의 인상 등으로 인해 노동자의 실질적 소득이 감소했다는 뜻(*출처 : 우리말샘)의 신빈곤은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해결되지 못한 사회적 문제다. 아니, 팬데믹 이후 더욱 심각해진 난제다.
현대에 등장한 신빈곤은 끼니를 굶거나 잘 곳이 없어 노숙을 하던 20세기 중후반의 빈곤과는 다르다. 따듯한 잠자리에 삼시 세끼 잘 챙겨 먹고 있지만, 현대인들은 빈곤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분명 이전보다 생활 수준이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풍족함을 느끼지 못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의 본성인 상대적 박탈감으로 인해 스스로 빈곤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전반적인 생활 수준이 높아짐으로 인해 빈곤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고, 동시에 SNS의 발전으로 전 세계 상류층의 호화로운 삶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너도나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명품 하나 없으면 가난하다고 느끼고, 1년에 한두 번은 꼭 해외여행을 가야 행복한 삶이라고 여긴다. 스스로가 정한 평균과 세상이 정한 평균의 괴리감에 무한한 결핍감을 느낀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잘 사는 것은 결국 ‘남들보다 더’ 잘 사는 것으로 정의되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매년 신빈곤을 키워드로 한 칼럼과 기사가 끊이질 않는 이유는 아마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 너무 쉬운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클릭 몇 번으로 우월감을 느낌과 동시에 좌절감을 느낀다. 부럽다는 말은 언젠가부터 습관적 칭찬으로 변했다.
나는 정말로 그들을 부러워하긴 했던 걸까. 평균 이상의 ‘잘 사는 삶’이기 때문에 부러움을 당위적으로 느껴야 했던 건 아닐까. SNS에 줄곧 등장하는 번쩍이는 사람들을 부럽지 않다고 말할 때마다 질투하지 말라고 하던 이들은 과연 누구를 질투하고 있었던 걸까. 고개를 들어 풍족한 세상과 빈곤한 세상을 번갈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