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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 Jun 18. 2024

우울해지고 싶은 사람

#20번째 단상 - 우울에 대하여

독립잡지를 만드는 동료들과 함께 회의를 마친 뒤 교자를 먹으러 간 날이었다. 긴장이 풀리면 으레 그렇듯, 우리는 의식이 지배하지 않는 선에서 뜬구름을 잡는듯한 병렬적인 문답의 시간을 즐겼다. 미쉐린 가이드는 타이어 회사가 만든 거 알아요? 저는 7년째 MBTI가 똑같아요. 와, 저도 그 애니메이션 좋아하는데. 가끔은 우울한 영화를 일부러 찾아보곤 해요. 근데, 그거 자해 아니에요? 네? 자해요?


지금까지 즐겨보던 영화나 만화를 곱씹어보니 어두운 분위기의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디스토피아와 허무주의, 피카레스크와 퇴폐물로 가득 찬 내 시청 기록은 마치 악마의 서가처럼 느껴졌고, 일부러 우울감에 깊이 빠져들곤 하는 나에게 낯선 공포감을 느꼈다. 나는 나를 훼손하고 있는 걸까. 내 마음의 어떤 악마가 나를 우울의 늪에 빠져들게 하는 걸까.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머리가 핑 돌고 가슴이 답답했다. 아, 우울하다. 집 가서 미스트나 다시 볼까…


지하 선정 결말이 찝찝한 영화 독보적 1위  <미스트>(2008) 


그런 날이 있다. 이유는 없지만 그냥 우울하고 싶은 날. 창밖에 비가 내려서 그런 게 아닌, 사랑하는 사람과 얼굴을 붉혀서 그런 게 아닌, 그냥 우울감에 푸욱 빠져버리고 싶은 날. 누군가 꺼내주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빠져나오고 싶지도 않다. 그저 우울이란 감정 외엔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은, 그런 감정이다. 그리고 이런 날은 내게 그 어떠한 하루보다 특별하고, 소중한 날이다.


SF 작가 김초엽의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단편 <감정의 물성>에도 나와 비슷한 성향을 보인 인물이 등장한다. 문구 제품을 만드는 회사 ‘이모셔널 솔리드’는 인간의 감정을 물체화한 ‘감정의 물성’을 판매한다. 자그마한 돌처럼 생긴 그 제품은 손에 쥐는 것만으로도 해당 감정을 느낄 수 있는데,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게 하는 물성뿐 아니라 ‘우울체’ ‘공포체’와 같은 부정적 감정의 물성도 존재한다. 그리고 분명 이해가 안 간다고 말하겠지만, ‘우울체’는 베스트셀러다.



“다들 쓰지 않아도 그냥 그 감정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언제든 손안에 있는, 통제할 수 있는 감정 같은 거죠.” - <감정의 물성> 中


주인공 ‘정하’는 자신의 애인 ‘보현’이 ‘우울체’를 구매하는 이유를 도통 이해하지 못한다. 정하의 눈에 손에 쥐는 것만으로도 우울감을 느낄 수 있다는 감성의 물성은 마치 유사 과학을 이용한 바이럴 마케팅으로 보인다. 게다가 하필 고른 감정이 우울이라니. 돈을 내면서까지 우울할 이유가 있단 말인가. 아마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 역시 보현의 행위를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 누구보다도 보현의 행위에 충분히 공감할 자신이 있다. 인위적으로 우울에 빠지고 싶은 그 느낌을 백번이고 이해할 수 있다. 보현은 그저 기쁨, 행복, 즐거움과 같은 일반적인 감정을 느끼길 원하는 것처럼 ‘우울’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싶은 것뿐이다. 우리가 코미디 영화나 멜로 영화, 공포 영화를 보며 감정을 충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보현이 우울체를 손에 쥔 이유와 내가 우울한 작품을 즐기는 것은 단지 ‘우울감’을 느끼기 위함이다.


"소비가 항상 기쁨에 대한 가치를 지불하는 행위라는 생각은 이상합니다. 어떤 경우에 우리는 감정을 향유하는 가치를 지불하기도 해요. 이를테면, 한 편의 영화가 당신에게 늘 즐거움만을 주던가요?" - <감정의 물성> 中



대부분의 사람이 이러한 행위를 기괴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우울감을 ‘부정적인 감정’이라고 여겨왔기 때문이 아닐까. 인간에게 우울은 항상 극복의 대상이었고, 사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다고 여기곤 하니까. 물론, 맞는 말이다. 심리학적으로도 뇌과학적으로도 ‘우울’이라는 감정을 지나치게 받아들이면 인간이 몸과 마음이 지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울감이 인간에게 해롭다는 단정은 인간의 감정에 대한 큰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우울감이 찾아오면, 대부분의 이들은 '무엇이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지', 혹은 '우울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만 고민한다. 부정적인 감정을 마음의 방 안에 한 발짝도 허용하지 않고, 오직 문제를 풀 듯 해결하려고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나쁜 감정은 없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기쁨이’의 빈자리를 가장 많이 채워주는 존재는 다름 아닌 ‘슬픔이’다. 방 안을 모두 ‘행복체’로 도배한다면 나를 힘들게 만드는 요인을 자각하지 못할 게 분명하다. 마치, 행복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은 마약중독자처럼.


영화 <인사이드 아웃> 中 슬픔이와 기쁨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한 사강의 말은 이처럼 우울함에 맞서기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한 위로가 아니었을까. 몸과 마음에 여유가 넘칠 때 우울한 감정이 느껴진다면, 하루 정도는 이를 극복하려 애쓰지 말고 받아들여 보길 권한다. 우울함의 이유를 찾지 말고, 아, 우울이란 이런 느낌이구나 하고 푸욱 빠졌다 나오면, 나중에 우울함이 갑작스럽게 튀어나올 때 이를 더 직관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단, 우울은 까도까도 끝이 없는 마성의 매력이 있기 때문에 너무 깊이 빠져들진 마시길…) 그러니 우울해지고 싶은 사람을 너무 이상하게 쳐다보지 마시고, 요상한 취미를 갖고 있는 사람이군 하고 생각해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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