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번째 단상 - 탈모에 대하여
남자 헤어모델은 귀하다. 헤어모델은 보통 디자이너가 되기 위한 인턴 미용사가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채우기 위해 이루어지곤 하는데, 여성에 비해 남성 모델이 현저히 부족하다. 촬영에 대해 남성이 상대적으로 더 부담을 느끼고, 미용실을 옮기기 귀찮아서 원래 깎던 미용실에 주로 방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헤어모델을 통한 미용을 자주 이용하곤 하는데, 모델은 공짜로 머리를 자를 수 있고, 디자이너는 포트폴리오를 채울 수 있는 그 시스템이 서로에게 큰 이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운이 좋은 나는 지금껏 대략 열 번에 가까운 모델 촬영을 했고, 그때마다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미용실을 나섰다. 그리고, 좋은 인상을 받았던 한 미용실에서 1년 만에 연락이 왔다. “지하님, 혹시 파마하실 생각 없으세요?”
...파마요? 휴대폰 액정에 비친 파마라는 단어를 보자 나는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4살 때 엄마의 등에 업혀 허름한 동네 미용실에서 파마했던 적을 제외하고, 나는 단 한 번도 스스로 파마를 하지 않았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서가 아니라 머리가 빠질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는 머리카락이 얇고 숱이 적다. 친할아버지도 그렇다. 그리고, 당연하게 (예외였으면 좋겠지만) 나도 그렇다. 나는 벗어날 수 없는 탈모인의 DNA를 갖고 태어난 젊은 탈모인이다.'
검색창에 탈모를 검색하기만 해도 수많은 정보와 제품, 그리고 청년들의 설움 넘치는 고민글이 쏟아져 나온다. 고등학생인데 증조할아버지까지 모두 탈모예요, 무슨 방법 없을까요? 원형 탈모로 고생 중인 21살입니다. 약 먹으면 해결되나요? 등교하기 전에 샤워할 때마다 머리가 수십 개씩 뽑히는 기분이에요. 이거 탈모 맞나요? (+사진 첨부합니다) 슬픔과 불안으로 가득 찬 젊은 탈모인들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생각한다. 아, 탈모는 중년인들만의 고민이 아니었구나. 탈모로 고통받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구나. 그날 나는 생김새도 모르는 익명의 탈모인들에게 묘한 안도감과 함께 위로를 받았다. 그렇게 나는 자연스럽게 탈모인의 대열에 합류했다.
탈모약을 언제부터 먹었더라.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2년은 넘은 것 같다. 처음 탈모약을 접했던 건 친구의 담담한 고백이었다. ‘나 얼마 전부터 탈모약 먹는다. 너도 늦기 전에 먹어.’ 스트레스를 많이 받지도 않고, 나보다 머릿결도 좋았던 친구의 탈밍아웃은 내게 너무나도 큰 충격을 선사했다. 탈모약은 아저씨들이나 먹는 거 아닌가? 이렇게 부끄러운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다고? 당시에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친구의 권유를 못 들은 척 흘려보냈지만, 기숙사 배수구에 낀 머리카락 대부분이 내 머리카락이라는 것을 발견하자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다. “OO아, 네가 말한 성지가 어디라고?”
대한민국에는 휴대폰 성지만 있는 게 아니다. 종로에 위치한 모 이비인후과는 탈모인들에게 유명한 성지로 꼽히며, 탈모인들에게 은근한 명성을 떨치고 있다. 진료비가 저렴하고, 약값이 싸기 때문에 지방에서 올라오는 탈모인들도 수두룩하다고 한다. 물론, 제대로 된 진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비판도 있지만, 몇 년째 그 인기는 식지 않고 유명세를 타고 있다.
직접 방문한 병원의 첫인상은 정말이지 순도 100%의 ‘우울’ 그 자체였다. 음기가 가득 낀 것처럼 병원 내부의 공기는 추욱 가라앉아 있었고, 사람들의 표정은 전부 화가 난 것 같았다. 평일에 방문했음에도 불구하고 병원은 대기 손님으로 꽉 차 있어 1시간은 족히 기다려야 했다. 암울한 분위기에 압도된 나는 무표정을 짓지 않으면 쫓겨 날 것 같아 입꼬리를 내렸고, 누군가의 머리를 힐끗 쳐다보는 순간 시비가 걸릴 것 같아 두 눈을 꼬옥 감았다. 마치, 감방에 신입으로 들어간 기분이었다.
대기실에서의 시간은 영겁같았지만, 진료는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의사 선생님은 마치 코딩된 기계처럼 최적화된 움직임으로 탈모약 복용 전후 사진을 보여주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움푹 들어간 이마를 가리키며 혹시 많이 심각한 단계냐고 물었지만, 의사 선생님은 껄껄 웃으시며 대답했다. ‘고작, 이 정도로 너무 겁먹지 말아요. 대기실에서 봤던 다른 환자분들 보셨죠? 아직 늦지 않았으니, 지금부터라도 대비하면 괜찮을 겁니다. 자, 3개월 치 줄 테니 가을에 봅시다.’ 떨림과 걱정과 기대와 안도. 체감상 30초도 되지 않았던 것 같은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너무 많은 감정을 마주했고, 얼떨떨한 기분으로 진료실을 나섰다. 해결되지 않은 찝찝함이 느껴졌지만 별 수 있나. 썩은 동아줄이라도 일단 잡고 봐야지.
의사 선생님의 설명이 부족해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아쉽게도 탈모약은 치료제가 아니란다. 머리가 잘 자랄 수 있도록 유지만 해준다는데, 100분 토론 뺨칠 정도로 설왕설래하는 글들을 보니 그마저도 확실한 건 아닌가 보다. 성기능 저하와 우울증과 같은 부작용에 대해서도 말이 많은데 어차피 20대에 머리가 다 빠지면 남자구실도 못 하고 우울증도 올 것 같으니 그냥 약을 먹는 게 낫지 않을까. 원효대사 해골물이라도 좋으니 샤워할 때마다 불안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같이 씻겨 내려갔으면 좋겠다. 부디 살아 있는 동안 완벽한 탈모 치료제가 개발되길 바라며...
아, 젊은 탈모인은 참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