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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 Mar 04. 2023

일회성 관계가 주는 나비효과

[소설] <일인칭 단수> 서평 - 무라카미 하루키


처음으로 하루키의 글을 읽었다. 독서가 취미라면서 왜 그간 하루키를 읽지 않았냐고 한다면 답은 글쎄... 손이 가질 않았다고 해야 하나. 남들이 다 좋다고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만 내가 하루키의 책에 끌리지 않았다는 데에는 이유가 없다. 그냥 언젠가 읽겠지라는 마음으로 하루키 붐이 잦아들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그러던 중 왠지 모르게 도서관의 문학 코너에 가고 싶었고 왠지 모르게 일본 문학 서적이 가득한 칸에 눈길이 멈추었다. 나는 짧지만 강렬한 제목인 <일인칭 단수>를 손에 쥐었고 책을 돌려 앞표지를 본 순간 익숙하지만 초면인 작가의 이름과 마주쳤다. '아 드디어 하루키의 소설을 읽을 때가 찾아왔구나' 나는 흥분과 담담함이 적절히 섞인 감정으로 드디어 그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책은 총 8개의 짧은 글들로 구성된 소설집이었다. 아니. 말이 소설집이지 8개의 에세이를 묶어 놓은 듯했다. 어디까지가 하루키의 이야기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모르겠는, 소설과 에세이의 어중간한 경계에서 8명의 주인공은(아마 하루키 자신일 확률이 높겠지만)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밝힌다. 같은 아르바이트생과 그저 하룻밤을 보낸 일, 어렸을 적 같이 피아노를 배웠던 친구의 기묘한 초대, 말하는 원숭이와 함께 맥주를 마시며 했던 그의 은밀한 고백, 못생긴 얼굴에 개의치 않는 한 여성과 나눈 피아노 곡 이야기. 소설집에 등장하는 작품들은 저마다의 기묘하거나 일상적인 얘기로 가득하지만 그것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그들이 "일회성 관계"에 그쳤다는 것.


살면서 그런 관계들 있지 않나. '어차피 안 볼 사이인데 뭐' 라거나 '설마 살면서 한 번이라도 마주치겠어?'라고 처음부터 시작점을 달리하는 관계들. 일회성에 지나지 않는 관계에 에너지를 쏟기 싫거나, 혹은 그냥 자신과 결이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등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일회성 관계"에 그닥 관심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놀랍게도 "일회성 관계"가 우리의 삶에 굉장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하루키의 책을 읽고 깨달았다. 


우리의 기억은 익숙한 것일수록 오래 기억하지만 익숙하기 때문에 금방 까먹는다. 까먹기보다는 무뎌진다는 게 맞는 표현일까. 매일 같은 회사에 출근하고, 같은 도서관에 방문하다 보면 오늘이 무슨 요일이었는지, 이게 어제 먹었던 음식인지 오늘 먹은 음식인지 까먹곤 한다. 그래서 일상의 소소한 기억보다 평범하지 않은 사건사고가 더 강렬하게 머리에 남는다. 단편 <돌베개에>의 첫 문단에서 주인공은 "사실 나는 그녀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p.9)라고 하지만 얼굴도 생각나지 않는 그녀와 함께 했던 하룻밤을 생생하고 세밀하게 묘사한다. 두 번째 단편 <크림>에서 역시 "우연히 같은 피아노 학원에 다닌 사이일 뿐이었다."(p.31)고 하며 일회성 관계임을 자각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하루키의 소설이 대부분 과거의 어느 한 지점, 일회성으로 끝나는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것처럼 우리의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것은 일상과 상당히 거리를 둔 사건들일 것이다.


혼자 여행을 다니다가 어쩌다 만난 사람이거나, 과거에 얼굴만 알고 지냈던 같은 반 친구, 같은 동네에 살아서 몇 번 인사했지만 이제는 다른 곳으로 이사가 더 이상 보지 못하는 이웃 주민들까지 세상에는 수많은 "일회성 관계"들이 넘쳐 난다. 작가가 주인공의 과거를 상상하며 글을 쓰는 것에 더해서 나는 '만약 일회성 관계를 계속해서 반복하면 어떨까?'라는 상상을 해보았다. '시작부터 끝을 정한 일회성 관계가 우연처럼 겹치고 겹쳐 결국 지속적 관계가 되어버린다면 이야기의 결말은 바뀌었을까?'라고 말이다. 결국은 흔한 망상에 지나지 않는 가정이지만 나는 확실하게 삶이, 인생이, 기억이 바뀌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별한 것은 평범하지 않기 때문에 특별한 것이다. 더 이상 만나지 못하고, 짧은 시간밖에 만나지 못해야 각별하고 특이한 경험이 된다. 아무리 좋아하는 연예인이 내 옆집에 살더라도 하루, 일주일, 일 년, 십 년을 만나게 된다면 그 익숙함에 처음 만났던 감정은 금세 잊힐 것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일회성 관계를 더 만들거나 덜 만들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아무 감정 없이 지나칠 수 있는 사람, 혹은 사건들이 나중에 나에게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루키의 소설 <일인칭 단수>에서 평범한 일상 속 특이했던 사건을 캐치하는 것과 같이 우리도 살면서 언젠간 사소한 것으로부터 무언가를 깨닫는 날이 있을 것이다. 반복되는 일상이 무료하고, 매번 만나는 사람들만 만나고 있다면 한 순간에 지나쳤던 관계들을 잘 생각해보라. 그닥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던 사람들과의 기억을 잘 살펴보면 그 찰나에 숨어있는 수많은 감정 속에서 뜻밖의 보물을 찾을 수도 있을지 모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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