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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 Mar 08. 2023

마약이 합법인 세상

[소설] <…스크롤!> 서평 - 정지돈

"과거의 인류와 달리 먹을 것도 풍족하고 수명도 늘고 모든 사람들에게 잘 곳도 주지만 매일매일이 너무 불행하게 느껴진다. 이 불행은 어디서 오는 걸까. ... 철학자들은 그 이유가 증명 체제 때문이라고 믿는다. ... 끝없이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고." p.96


우리는 끝없이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더 좋은 성적과 더 좋은 결과물. 더 많은 연봉과 외적으로 드러나는 성공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을 계발하거나, 혹은 자신을 갉아먹거나.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 증명하는데 가장 쉬운 방법은 "결과"를 보여주는 일이다. 자신이 성장해 온 과정을 아무리 상세하게 말해도 세상이 원하는 답은 따로 있다. "그래서 당신이 이룬 것이 무엇이죠?"


소설 <…스크롤!>은 장편소설로 분류되지만 나는 이 책을 '현대 마약이 판치는 세상 속에서 좌절하는 한 사람의 일기장'으로 부르고 싶다. 크리스티안 펫졸드의 구절 "꿈을 꾼다는 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투기 자본 시대에 …"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돈과 명예, 권력의 결과물에 심취한 현대시대를 간접적으로 비판함과 동시에 무분별한 현대 마약(이것은 실제 마약이 아닌 SNS, 가짜 뉴스, 미신, 음모론, 선동 등을 칭한다.)에 중독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책이다. 1~3페이지의 짧은 챕터와 개연성 없이 등장하는 그림과 독백.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단체와 의문투성이의 단어 등 소설의 구조가 특이하다 보니 서사에 집중하기보다 작가가 전하는 문장에 집중하여 책을 읽었다. 책이 전체적으로 난잡하지만 작가가 전달하려는 바는 확실하다. 소설 속 세상과 현실은 다를 것 없다고.


소설 속 세상에서 마약은 합법이다. LSD, 캔-D로 불리는 마약은 우리가 일상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처럼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주사기를 혈관에 꽂아도 특별하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저 "안정감"이 든다는 것 정도? 아마 그 자체를 마약으로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볼리비아에서 공정무역으로 거래되어 수익의 20퍼센트가 저소득층의 교육 프로그램에 쓰인다고도 하니 말이다.


마약을 복용하는 것에 일체 거부감이 없는 세상을 보며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의 마약을 떠올렸다. SNS 중독, 화면 속 연예인들에 대한 악플, 출처 없는 가짜 뉴스, 자극적인 컨텐츠, 음모론과 선동 등 우리의 일상 속에 무의식적으로 잠재한 마약에 대해 말이다. 분명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지만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린 탓일까. 더 큰 자극이 아니면 만족되지 않는 디지털 세상은 마약이 합법인 세상과 다를 바 없다.


소설 속 공간 "메타북스"는 실체가 없지만 실존하는 거대한 그룹이다. 그곳은 천장도 없고, 중심지도 없으며 경계선도 없지만 확실하게 존재한다. 마치 우리와 24시간을 함께 하는 네모난 휴대폰의 "가상세계"처럼 말이다. 모두가 생산자이자 소비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은 곧 모든 사람이 살인자인 동시에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소리다. 어디서 퍼왔는지도 모르는 자극적인 영상에 달리는 수많은 댓글. 좋아요 수가 많은 댓글이 곧 세상의 진실이라고 믿고 가치관이 확립되는 시대. "그렇다더라." "그렇다는데?" "그런가 보다!" 무분별하게 늘어나는 정보의 양과 누구나 정보의 생산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로 디지털의 발달이라고 할 수 있을까? "메타북스"의 규모가 더욱 커질수록 주인공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은 점차 줄어든다.


"프랜은 단지 말들을 떠돌게 하고 싶었다. 대단한 예술 작품, 베스트 셀러, 히트작, 영원불멸의 클래식 따위를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 어떤 생각, 아이디어, 논평, 꿈, 일상, 작은 이야기, 사소한 논쟁들이 우리 주변을 맴돌며 하루하루를 즐겁고 슬프게 스치고 사라졌으면 했다. 이게 뭘까? 이건 어떤 종류의 꿈일까?"
p.71

프랜은 자신의 꿈이 어떠한 꿈인지 묻고 있지만 그 스스로도 알고 있을 것이다. "돈이 안 되는 꿈"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 못하는 꿈" "전형적인 성공에서 멀어지는 꿈" ... 사람들이 나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주체적인 모습으로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나의 꿈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의아해하는 표정을 장착한 채 다시 내게 묻는다. "아니 그게 아니라,  어떤 사람(직업, 회사, 아파트, 차)이 되고 싶냐고"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하지 못해서일까. 목소리는 작아지고, 말끝을 흐린다. "그러니까 나는 주체적인 모습으로 ... 읽고 쓸 수 있는 ... 그런 사람이 되는게..."


습관적으로 SNS에 접속한다. 자신의 팔로워 수와 좋아요 수를 확인하고 남들과 비교한다. 더 높은 숫자일수록 성공에 다가갔다고 생각하며 꿈을 수치화한다. 일련의 과정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수치로보이는 결과물만이 나를 증명해 줄 유일한 수단이다. 더욱 자극적이고 화려하게, 남들보다 더 인기 있어야 성공한다는 생각으로 감정을 투기한다. 책을 덮고 세상을 둘러보니 각종 마약이 합법인 소설 속 세상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아무래도 별다를 바 없는 것 같다. 우리는 모두 현대 마약의 중독자가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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