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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 Mar 13. 2023

나의 마음을 채워주는 사물들

[에세이] <소설가의 사물> 서평 - 조경란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미국의 한 노작가가 어떻게 하면 작가가 될 수 있느냐는 문학청년의 질문을 받고는 그에게 되물었다.

"당신은 단어를 좋아하십니까?" 
p.256

단어를 좋아한다는 것은 참 설레는 일이다. 애정이 담긴 물건, 찰나의 감정, 혹은 이루고 싶은 꿈들이 단어라는 실체를 갖고 나에게 간직되는 것. 그 간질거리는 느낌이 좋아 나는 내가 좋아하는 단어들을 모아 메모장에 수집한다. 머리끈, 다이어리, 노트북, 스티커, 사랑, 평화, 명상, 산책, 헤드셋, 반지. 좋아하는 단어들을 나열하자면 이 페이지가 꽉 찰 때까지 쓸 자신이 있을 정도로 나는 좋아하는 단어가 많다. 모든 단어들이 각자의 주파수로 나의 마음을 두드릴 때마다 그 단어가 주는 떨림이 나를 자극시킨다. '오늘은 어떠한 단어가 나의 마음을 울릴까'하며.


단어를 좋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일상에서 자주 마주치는 사물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물건들임에도 관심이 없다면 쉽게 좋아할 수 없다. 나에게는 "치약"이 그러한 물건인데, 새 포장지를 뜯은 지 얼마 안 된 것 같음에도 금세 바닥을 보이는 내용물을 보며 평소에 치약에게 얼마나 관심이 없었는지 새삼 깨닫는다. 반대로, 매일 마주침에도 항상 관심을 쏟는 물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나의 "일기장"이다. 잠에 들기 전, 하루를 기록하는 일기를 쓴 지 벌써 3년이 지났음에도 나에게 집중하는 그 10분이라는 짧은 시간이 너무나도 반갑고 소중하다. 만약 우리 집에 불이 나서 딱 한 가지의 물건만 가지고 나올 수 있다면 주저 없이 일기장이 담긴 상자를 선택할 만큼 나는 나의 일기장을 사랑한다.


이렇듯 일상에 존재하는 사물을 좋아하게 되면 저절로 그것에 대한 글이 쓰고 싶어 진다. 조경란의 에세이집 <소설가의 사물>은 지도, 볼펜, 연필, 달력 등 저자가 좋아하는 사물들을 주제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에세이다. "오늘을 기록하고 오늘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p.9)라는 말로 시작되는 그녀의 에세이에서 일상과 사물이 주는 소소한 행복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점심에 먹은 김치볶음밥, 글을 쓰며 마시는 커피 한잔, 갈색 포스트잇에 적힌 누군가의 진실된 마음에서 나는 오늘의 세상을 느낀다. 나 역시도 오늘의 행복을 오래 간직하기 위해 매일 글을 쓴다.



"소설 쓰기란 결국, 하찮은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기거나 진지한 것을 하찮게 생각하기 둘 중 하나다."
p.34


생각해 보면 그렇다. 하루에 한 권의 책을 읽고 한 편의 글을 쓰다 보면 "이게 정말로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일까?" 하며 읽고 쓰는 것의 소중함을 의심하면서도, "세상의 따끔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읽고 쓸 수 있는 것에 흥미를 잃지 않을 수 있다니.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라며 나의 꿈을 소중하게 간직한다. 하찮아 보이는 일상에서 반짝이는 재료들을 찾아내고, 진지한 상황에서 긴장을 풀고 주위를 둘러볼 수 있는 힘 덕분에 오늘도 나는 글을 쓸 수 있다. 하찮은 것과 진지한 것을 적절하게 번갈아 끼우면서 나는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하루를 살아간다.


주기(注記): 사물을 기록하는 일.

인생을 사물로 기록하는 표를 만든다면 어떤 목록을 추가할 수 있을까.(p.132)


책에 등장하는 저자의 사물들은 30개가 훌쩍 넘는다. 각자의 사물들에 담긴 에피소드를 즐기며 든 생각은 "더욱더 메모를 사랑해야지"였다. 모든 사물들에는 분명히 이야기가 담겨있다. 노트북이 고장 나 나의 글들이 다 날아갔을 때도, 5분마다 신발끈이 풀리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운동화에도, 1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사랑하는 나의 줄가라 니트도. 모든 사물들이 나의 글감이자, 나를 만드는 재료들이다. 오늘의 사물로부터 느낀 감정들을 쉽게 날려버리지 말고 기억하기로 했다. 작은 수첩이든, 핸드폰의 메모장이든 오늘의 나를 만들어준 사물들에 더욱 집중하여 나의 기억을 지켜나가기로.


여러분이 좋아하는 사물들이 궁금하다. 각자의 애정과 추억이 담긴 사물들. 단순한 "사물"의 영역을 넘어서 자신을 채울 수 있는 그런 사물들 말이다.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기 전에 '나의 사물'을 하나 떠올려보는 것은 어떨까?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사물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한 삶의 시작점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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