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더 이상 나를 가르치려 들지 마십시오

[소설] <싯다르타> - 헤르만 헤세

by 지하

책에 대한 서평을 작성하기 전에 먼저 나는 아무런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음을 밝힌다.


어렸을 적 같은 동네에 사는 친한 친구를 따라 몇 번 교회에 놀러 간 것과, 절의 특유한 분위기에 이끌려 여행 도중 몇 번 사찰을 방문한 것을 제외하면 종교에 대한 경험이 아예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부모님 역시 무교이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종교를 체험하지도 않았으니 종교에 관한 나의 지식은 백지상태와 같다. 책의 전반적인 흐름은 불교적 구도를 깨달아가는 것이지만, 이 책이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는 특정 종교의 교리가 아닌 "깨달음"에 초점을 맞추었으니 종교적 관점으로 글을 해석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책의 저자도 분명 그렇게 생각했을 테니.


앞서 말했듯 나는 무종교인이다. 딱히 종교에 거부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끌리지도 않았다. 아마 주변에 종교인이 없었기 때문에 종교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가 적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지인이 이 책 <싯다르타>를 추천해 주었을 때 나는 제목 만을 보고 종교에 관련한 책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종교에 대해 모른다고 해도 싯다르타라는 말이 석가모니를 뜻하는 것은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책을 다 읽은 뒤에 이 책은 절대적으로 종교서적이 아님을 깨달았다. 오히려 성장소설, 철학소설에 가까웠다. 책의 제목이 곧 책의 전부라고는 하지만 예외는 있었구나. 하마터면 평생 선입견을 가진 채 이 대단한 작품을 놓칠 뻔하였다.


책은 주인공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정처 없이 떠도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주인공 싯다르타는 바라문의 아들임에도 주어진 운명을 거스르고, 사문들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았으며, 부처의 가르침이 아닌 스스로의 깨달음이 진정한 해탈이라고 믿는다. 개인은 종교적 가르침, 교리, 신앙이 주는 가르침에 구속되지 않고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죽음으로부터의 해탈은, 당신이 그것을 얻기 위하여 나아가던 도중에 당신 스스로의 구도 행위로부터, 생각을 통하여, 침잠을 통하여, 인식을 통하여, 깨달음을 통하여 얻어졌습니다. 그것이 가르침을 통하여 이루어지지는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p.55)


가르침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곧 시스템에서 탈출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부처의 가르침을 통해 구도의 길을 걷는 것이 정답이라고만 생각한 순례자들 사이에서 스스로의 길을 찾기 위해 무리에서 나오는 일은 굉장한 용기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이는 마치 정석의 길로 여겨지는 "공부"를 거부하고, 자신의 꿈을 찾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는 일과 비슷한 사례다. 위대한 부처의 가르침이 아니면 도대체 어떻게 깨달을 수 있단 말인가. 부처의 말씀만이 진리라고 믿었던 세상에서 스스로 깨닫는다는 건 반역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버젓이 스스로의 길을 걷는다. 순례자라면 가히 상상할 수도 없는 기생과의 사랑, 속세에서 제일 우선시 되는 가치인 돈을 좇는 일, 술과 도박에 빠져 당장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행위 등을 통해 그는 세상을 깨닫는다. 순례자가 돈을 탐하고 술과 도박, 사랑에 빠지다니 그가 정말로 구도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 맞을까? 도대체 이러한 행위들이 세상을 깨닫는데 어떠한 도움을 준다는 것인가?



혹시 이런 말씀 드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스님은 지나칠 정도로 구도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구도 행위에 너무 매달린 나머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요?
(p.202)



순례자이기 때문에 욕구를 멀리한다. 사문이 되기 위해 주체성을 포기한다. 부처를 따라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뜻을 굽힌다. 이러한 공식은 도대체 누가 정한 것인가. 사회적 알람에 맞추어 자신을 스스로 가두는 행위들. 이를테면, 학생은 학교에서 공부를 해야 하고, 대학생은 취업을 준비해야하고, 사회인이 되려면 회사에 들어가 돈을 벌어야 하는 짜여진 스케줄표에서 우리는 진정 자유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의 행위가 옳든 그르든 그가 선택한 길은 평범한 순례자와는 정반대의 길이다. 그는 스승이 정한, 부처가 정한, 세상이 정한 구도 행위를 스스로 거부한다.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귀를 닫고, 내면으로부터 들리는 자신의 목소리에 집중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행복은 어디서부터 찾아오는가.' '진정한 깨달음, 나만의 깨달음은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그의 사색이 마치 철학적 고민과 비슷하게 보이지 않는가? 그렇다. '당신은 바라문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앞으로 이렇게 살아가십시오.'라는 사회의 정답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정답을 만들어 나가는 것. 그것이 이 책의 진정한 주제이자 우리가 집중해야 할 태도다.



함께 사문의 길을 걸으며 누군가의 가르침에 자신의 인생을 바친 고빈다에게 싯다르타는 이렇게 말한다.


가르침은 아무런 단단함도, 아무런 부드러움도, 아무런 색깔도, 아무런 가장자리도, 아무런 냄새도, 아무런 맛도 갖고 있지 않아. ... 자네가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바로 이 가르침이라는 것, 바로 그 무수한 말들이 아닐까 싶어.
(p.212)


싯다르타의 말처럼 우리가 언제나 불안한 이유는 아마 주위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가르침의 목소리 때문이 아닐까? 아무도 인생의 진리를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불안해지고, 그 불안함 때문에 우리는 타인의 가르침에 몸을 맡긴다. 하지만 그 가르침에 잠식되다 보면 우리는 점차 주체성을 잃게 될 것이고, 결국 이는 더 큰 불안을 가져올 것이다. 가르침은 나의 생각이 아닌 타인의 견해일 뿐 그 누구도 우리의 마음을 100%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오직 자신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가르침이 넘쳐난다. 조금 일찍 태어났기 때문에 인생의 "선배"가 되어버린 사람들의 조언, '너는 어려서 잘 모를 거야'라고 말하는 선생님들의 불필요한 잔소리, 성공하기 위해선 이렇게 행동하시오.라고 말하는 수많은 자기계발서. 이러한 가르침이 분명 우리를 순간적으로 번뜩이게 할 수는 있겠지만, 이 가르침이 진정한 깨달음이 될지는 미지수다. 깨닫는 행위는 스스로만이 할 수 있는 것. 결국 우리는 누군가의 가르침이 아닌 스스로의 배움을 통해 인생을, 나를, 세상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 책을 읽은 경험을 통해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는것 처럼. 주체적으로 글을 쓰며 인생을 탐구해 나가는 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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