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역사란 무엇인가> 서평 - 정기문
역사는 지루하고 딱딱한 암기과목. 역대 왕의 이름을 외우고 연도를 외우고 지역을 외우는 암기성 학문. 역사는 나에게 그러한 존재였다. 가끔 전쟁이야기나 발명이야기를 들으면 흥미가 들긴 했지만 까마득한 과거의 문화재나 왕의 업적을 통으로 암기하는 것은 나에게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한 수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고등학교 입시를 마지막으로 역사와는 이별일 줄 알았는데 이게 웬걸. 대학에서도 역사를 배워야 한다는 사실은 변치 않았다. 대학 필수 교양에는 "역사"항목이 포함되어 있었고, 전공 수업을 들을 때도, 전공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으로 첫 수업이 시작됐다. 취업을 준비할 때도 어느 기관에서나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자격증을 필수로 요구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역사의 그늘에서 도망칠 수 없었다.
'그만큼 역사를 강조한 데는 의미가 있겠지'하며 대학 교양수업 교재로 구입한 정기문 교수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펼쳤다. 분명 구매한 지 3년은 넘은 것 같은데 첫 장이 빳빳하다. 얼마나 역사에 관심이 없었으면 교재임에도 펼치지 않았을까. 흐릿한 기억 속 상당히 낮은 알파벳이 성적란에 찍혀있었다. 발가벗겨진 기분으로 글을 읽는 기분이랄까? 책을 읽는 내내 스스로가 무척 부끄러웠다.
역사란 무엇인가. 책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이 책은 과연 "역사"는 무엇으로 정의되는지에 대해 탐구하는 책이다. 다른 단어들과 달리 역사는 한 문장으로 정의하기 무척 어려운 단어이다. 역사는 시대에 따라 그 성격이 달라지기도 하며, 특히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성향에 따라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변화하기도 한다. "혁명" "시위" "보수" "성장"등의 단어가 사람마다, 사회마다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말이다.
위 사례처럼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집중한 부분은 바로 "순도 100%의 역사가 존재할까?"라는 의문이었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사람은 과거의 일을 회상할 때 나쁜 기억은 빨리 지워 버리고 좋은 기억만을 남기려는 "므두셀라 증후군"을 갖고 있다고 했다. 스스로가 경험했던 사건을 직접 기억함에도 100% 진실된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인간은 과거를 선택적으로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왜곡하려는 욕구 또한 가지고 있다(p.32)"고 저자는 말한다. 어렸을 적 추억이 담긴 고향이 실제 과거보다 더욱 아름답게 기억되는 것. 불운했던 과거가 사실보다 더욱 추악하다고 느끼는 것 역시 므두셀라 증후군의 예시이다. 우리는 흔히 이것을 기억 왜곡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과거의 역사를 기록했던 기록가와 그 사료를 해석하는 역사가 역시 모두 사람이기 때문에, 100% 객관적인 역사는 존재하기 어렵다는 생각에 나 역시 동의한다.
기억을 좋은 쪽으로 왜곡시키려는 인간의 욕구뿐 아니라 인간의 인식 구조에서도 역사는 100% 객관적일 수 없다는 의견이 존재한다. 저자는 "사건이 발생했던 시대의 인식 구조와 그 사건을 인식하는 시대의 인식 구조가 다른 데서 발생하는 역사가의 한계를 '인식의 구조'라고 부른다.(p.57)"고 말하며 역사가에게도 인식의 한계가 있음을 주장한다.
고대 아시아에 맛사게타이라는 식인 종족을 예로 들어 이를 살펴보자. 그들은 적절한 시기에 죽음을 결정했고, 모든 친척들이 모여 축제를 열었다고 한다. 그 이후에 노인의 시체를 삶아 먹는다. 그들은 이러한 죽음이 가장 좋은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식인이 금지된 사회에서 이러한 풍습을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현대의 역사사가들이 고대의 인식 구조에 아무런 편견을 갖지 않고 역사를 기록할 수 있을까? 지금도 수백 개로 나뉜 각 나라들, 부족들, 종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데 수천 년 전의 풍습을 완벽히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이렇게 불완전한 성격을 갖는 학문임에도 우리는 역사를 배워야 한다. 역사는 우리의 과거를 통해 현재를 깨닫게 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한다. 앞서 말했듯 100% 완전한 역사가 존재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 말은 즉, 누군가에 의해 역사가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과거의 사료를 통해 역사가는 진실에 가깝지만 자신의 주관이 담긴 역사를 만든다. 저자는 역사가는 프리즘과 비슷한 성향을 갖고 있다고 하며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빛은 가려 버리고, 마음에 드는 것만 비추게 한다고 했다. 즉, 조지 오웰의 말처럼 현제를 통제하는 사람이 과거를 통제하게 되는 것이다.
몇 년 전 나라를 들썩이게 한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사태"만 봐도 조지 오웰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다. 권력을 가진 개인, 또는 단체가 현제를 통제한 순간 우리가 배웠던 과거, 즉 역사가 변화한다. 특정인에 대한 평가, 사건에 대한 중요도, 선과 악의 구별 등이 순식간에 변하는 것이다. 이렇게 변화한 과거를 통해 우리의 미래는 변화한다. 기울어진 과거가 기울어진 미래를 만들며 미래를 통제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100% 진실된 역사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끊임없이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 일본과의 독도 문제, 중국과의 동북공정 등 우리가 주체적으로 역사를 통제하지 않으면 우리의 역사는 사라지거나 왜곡된다. 나라의 경제적, 지위적인 문제는 둘째치고 우리가 지금까지 축적해 온 사실들이 이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역사를 소홀히 하면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알 수 없으며,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에 대한 권리를 빼앗긴다. … 역사에서 주관성을 버려야 한다거나, 역사에서 민족적 색채를 버려야 한다거나, 절대 진리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역사를 버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스스로 무덤을 파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p.180)
지루하고 재미없는 암기과목. 맞다. 역사가 갖는 의의를 깨닫지 못하고 무작정 외우기만 했으니 그렇게 느낄만하다. 하지만 역사 역시 문학에 그 뿌리를 두었고, 100% 정답이 없다는 사실이 역사에 대한 나의 편견을 바꾸게 만들었다. 내가 지금까지 배웠던 역사가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나의 청개구리 세포를 자극했다. 혹시 또 다른 해석은 없을까? 다른 역사가가 해석한 결과는 다를까? 내가 해석한다면 나는 어떠한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역사는 나에게 새로운 문학적 카테고리가 되었다. 어떠한 가능성이라도 열려 있는 그 매력에 홀렸다랄까? 책을 덮은 뒤 도서관에서 또 다른 역사서적을 찾고 있다. 아무래도 나 역사를 좋아하게 될 것 같은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