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느낀다.

보이지 않던 것들과의 조우

by 지하

살아있음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일까.


사람마다, 순간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요즘 감정을 느낄 때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당연한 거 아니야? 사람이라면 감정은 당연히 느끼지." 뭐 그렇다. 지금까지 내가 느끼지 못했던 것도 아니고, 이게 뭐 대단한 일인가 싶기도 하다. 근데 그 당연한 것들을 마주쳤을 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깨달았을 때. 감정을 인식하고 받아들일 때와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때의 농도는 사뭇 달랐다. 막상 혼자 살아보니 청소와 빨래는 새삼 귀찮은 거였구나라고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 항상 내 곁에 있어서 그것이 가져다주는 의미와 존재 이유를 모른 채 살다가 얼마 전 문뜩 바라보았다. 보이지 않는 것들과 눈을 마주쳤다.


나는 언제 행복한가. 어떨 때 슬프지? 왜 지금 화가 날까? 지금은 피곤한 걸까 자고 싶은 걸까. 생각이 몰아친다. 그러다가 생각하기를 그만두기로 했다. 왜 기쁜 건지, 왜 싫은 건지. 그만 따지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감정을 잃어버렸다. 지금 내 기분이 어떤지 설명하기 어려웠으며, 남들이 웃으면 아 이건 웃긴 얘기구나. 뉴스를 보고 화를 내면 아 이건 화를 낼 만한 일이구나. 하며 감정을 베꼈다. 덕분에 삶이 편해졌다. 누군가와 싸우지도 않았고 피곤한 일도 줄어들었고 시간도 금방 흘러갔다. 이렇게만 살면 참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0과 1로 이루어진 물음에 0과 1로 이루어진 적절한 대답을 섞으면 꽤나 괜찮은 기계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기계로의 변형이 거의 완성되갈 때쯤 감정이 나를 찾아왔다. 무슨 바람이었는지 혼자이고 싶었고, 또 어떤 바람이었는지 서울에 가고 싶었다. 무작정 서울행 버스에 올랐고, 발길이 닫는 대로 걸었다. 한두 시간 정도 목적 없는 걸음을 하다가 '나 지금 뭐 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 때쯤 걷기 모듈을 멈추고 관찰하기 모듈로 바꾸었다. 나는 동묘시장 한복판에 있었고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목적 있는 발걸음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운동회에서 혼자만 단체티를 입고 오지 않은 느낌이 들어 굉장히 부끄러워졌다. '그래. 마침 동묘까지 왔으니 시장 구경이나 하자'. 더 이상 부끄러워지기 싫어서, 동묘에 왔다는 핑계를 대면서, 나도 그들 속에 합류하기로 했다.


출처가 불분명한 옷가지들이 나를 반겼다. 생전 보지도 못한 물건들이 나의 시선을 훔쳤다. 수많은 사람들의 이유 없는 행동들이 나를 흥분시켰다. '얼마 만에 이렇게 사람 많은 곳을 온 거지?' '혼자 이렇게 멀리 와본 적이 있었나?' '저 사람들은 저기서 무엇을 파는 거지?' '이게 이렇게 저렴하다고?' 욕조 안 올챙이에게 태평양은 너무나도 크고, 무섭고,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아 재밌다. 나 지금 신났구나. 즐기고 있구나. 나는 지금 행복하구나.' 그렇게 오랜만에 감정을 느꼈다. 느끼고 받아들이고 음미했다. '나 지금 행복한가? 행복해야 할 타이밍인가?'에서 ' 나 지금 행복해'로 바뀐 순간이었다. 실체가 없는 감정이 눈에 보이는 첫 순간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감정을 찾아다녔다. 막차를 놓쳐 38000원의 택시비를, 일개 대학생에게는 거액의 돈을 지불할 땐 나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마주쳤고, 처음 경험해본 콘서트에서는 전율이라는 감정을 만났다. 매일 먹는 점심밥에도 맛있다라는 녀석을 만났고,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을 땐 반가움이라는 친구도 함께였다. 감정을 흘려보내지 않고 인식하는 연습을 하자 매 순간이 새로웠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임에도 항상 새로웠다. 나는 생각보다 외로움이라는 친구를 즐겼으며, 그럼에도 관심이라는 친구와 만나고 싶었다. 흥분을 만나고 싶으면 서점에 진열되어있는 책들을 찾아갔고, 사랑을 느끼고 싶을 땐 사진첩에 들어갔다. 나와 감정은 별개가 아니라고 생각하였지만 막상 그것과 분리해보니 그것은 내 친구이자 낯선 이었고, 지인이자 타자였다. 그것들은 어떤 형태로든 나에게 다가와 나를 두드렸고 나는 단지 그것에 따르기보다 동행하기로 했다.


지나가는 것들에 시선을 두고 유심히 바라보자. 생각지도 않은 물음들이 나에게 다가올 것이다. 가령 반짝이는 트리를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거나, 추위에 대한 실증을 느끼거나. 곧 눈이 내릴 거라는 기대감이나, 올해도 다 지나간다는 아쉬움이나. 그런 감정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충분히 느끼길 바란다. 충분히 음미하고 온 몸으로 향유하여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내가 좋아하는 녀석들을 언제 좋아하는지, 싫어하는 친구들은 무엇인지, 숨어있던 친구들은 누구였는지 차근히 알게 될 것이다. 친구 한 명 사귄다는 샘 치고 감정을 느끼다 보면 내가 알던 세상과는 새삼 다른 세상이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지 출처 : 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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