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변의 카프카> - 무라카미 하루키
당신은 운명을 믿는가? 오늘 아침에는 늦잠을 잘 운명이었고, 가족과 친구 역시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으며, 태어난 날과 죽는 날이 미리 정해져 있다는 그런 운명 말이다. 운명을 믿는 사람들은 모든 일은 정해진 일이라고 생각하며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와 같이 운명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거부감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하고 신비로운 우연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우연을 자각한 순간, 사람들은 그 우연을 더욱 깊이 맛보기 위해 끊임없이 의미를 부여하고, 이는 곧 운명이라는 단어가 세상에 등장한 이유가 된다. 나처럼 신을 믿지 않지만, 신이 존재하길 바라는 사람들과 같이 운명을 믿지 않지만, 운명이 존재하길 바라는 사람들을 위해 운명을 믿게 해주는 책 <해변의 카프카>를 집어 들었다.
소설 <해변의 카프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작으로 출간 당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본국인 일본뿐 아니라 대한민국에서도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찾았으며, 하루키 붐을 이끈 대표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책은 상권과 하권으로 나뉘어 있으며, 도합 900페이지가 넘는 장편 소설이다. 하루키 스스로 '독자가 여러 번 읽어주길 바란다'라고 한 만큼 이 작품에 상당한 애정이 있어 보이며, 작품의 내용 역시 풍부하다. 그래서 그런지 성장기 소년의 성장과 방황, 정해진 운명으로부터의 도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젠더 등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너무도 다양해 한편으로는 부담스럽게 다가오기도 한다.
이 소설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아마 대부분 양가적인 감정을 동시에 느낄 것이다. 이 책은 재미있다. 그리고 난해하다. 소설의 이중구조와 비현실적인 상황의 연속, 꾸밈없이 드러낸 외설적인 표현, 시시각각 변화하는 장면 등 책을 읽으면서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라는 물음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렇게 궁금증이 생길 때마다 노트에 메모를 하고 인덱스를 붙이다 보니 의문을 가진 부분이 50개가 훌쩍 넘었다. 소설책에 이렇게 많은 물음표를 던진 적은 처음이었다.
각 메시지에 대한 의미는 분명히 존재한다. 15살의 소년이 숲 속에서 두 명의 군인을 만난다던가, 성별과 다른 성정체성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는 것에는 분명 작가의 의도가 숨어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메시지의 의미를 하나하나 다 따져보기엔 너무나 시간이 많이 소요될 것 같았고, 처음 읽는 것만으로는 이것들을 완벽하게 이해하기 힘들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 서평에는 운명과 방황에 초점을 맞추어 작품을 바라보기로 했다.
소설 속 주인공의 나이는 15살이다. 15살은 상징적인 나이로 인간이 가장 많이 방황하는 나이다. (왜 한국에도 중2병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15살의 나이는 인생이란 무엇일지 처음으로 생각해 보는 나이이고, 스스로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시기이며, 주관적으로 선과 악을 구분하는 나이이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15살은 삶의 난해함과 아이러니를 받아들이는 첫 시기이기도 하니 아직 경험이 부족한 그들에겐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마음이 물밀듯이 차오를 것이다.
그렇게 방황하는 15살의 소년이 가출을 하게 된다. 가출의 이유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 즉 폭풍우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다. 하지만 까마귀 소년이 말한 것처럼 소년이 폭풍우를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도망쳐도 결국 소년은 폭풍우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도망친 방향으로 폭풍우가 길을 바꿨다. 소년은 '폭풍우를 만드는 존재가 혹시 나 자신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운명을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결국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소년은 좌절감에 빠진다. 자신의 손으로 아버지를 죽여야 하고, 누이와 어머니와 잠자리를 가져야 한다는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행동이 결국 스스로의 운명대로 흘러간 꼴이라니 이 얼마나 허무한가. 이 소설이 말하는 운명대로라면 인간이 주체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의 착각일 뿐이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운명에 따라 발생하는 정해진 사건일 뿐이다. 마치, 한 치의 오차 없는 공장 속 기계부품처럼.
하지만 나에게는 이러한 결정적 운명론이 낙관적으로 다가왔다. 정해진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 역시 나의 운명이었다면 기분 좋게 받아들이면 된다. 반대로 생각하면 나의 선택이 곧 나의 운명이 된다는 것이 아닌가? 결국 운명을 거스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것이지 않은가? 폭풍우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지 않으려면 폭풍우를 받아들이면 된다. 어딜 가든 폭풍우가 날 따라온다면, 폭풍우를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주체는 나뿐이다. 자신의 운명을 움직일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자신 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대했던 일이 좌절되었을 때, 실패를 마주할 때 우리는 스스로의 운명을 탓하며, "나는 어차피 안 될 사람이야"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운명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어차피 이번 건 안 될 운명이었어. 다음 운명을 믿어보자"라는 생각으로 운명을 역이용할 수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카프카와 나카타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좌절하고 누군가를 탓하기보단, 주어진 운명을 따르는 그 과정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종착지가 동일한 운명이라도 자신이 어떻게 길을 만들고, 어떠한 방식으로 걸어가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크게 달라지는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운명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카프카와 나카타가 운명을 대하는 태도를 보니 운명이 있다고 믿어도 크게 상관없을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운명은 존재하고 그 운명까지 도달하는 길을 능동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더 힘이 났다. 개인의 노력으로 인해 정해진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수동적인 태도를 뛰어넘어 스스로의 길을 걷고,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내고, 스스로 정답을 내리며 스스로의 운명을 만들 수 있다면, 어느새 폭풍우가 무섭게 느껴지지만은 않을 것이다. 피할 수 없다면 받아들여라. 이미 정해진 결과라면 바꿀 수 있는 건 과정뿐이니 그 과정 속에서 삶의 의미와 행복을 찾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