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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 Aug 18. 2023

어른이 돼서야 공감할 수 있었던 어린 왕자의 문장들

[소설] <어린 왕자> - 생텍쥐페리


보아뱀이 코끼리를 삼킨 그림을 본 적이 있는가? 떨기나무를 먹는 양이 살고 있는 상자의 그림을 본 적이 있는가? 아마 이 글을 읽고 있는 대부분의 어른들은 이러한 그림들을 상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선, 보아뱀은 코끼리를 삼킬 수 없다. 그리고 일반적인 양은 상자에서 살 수 없다. 어렸을 때 이 책을 읽었을 때도, 10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이 책을 읽었을 때도 나는 위와 같은 생각으로 어린 왕자에 등장하는 그림들에 냉소를 보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은 대부분의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졌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그린 6살의 조종사도, 평범해 보이는 상자를 보고 양이라고 말하는 어린 왕자도 우리의 냉소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의 시선에선 우리의 정답이 틀린 것이니까. 아마 어린 왕자에 등장하는 그림의 정답을 맞출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정답이라는 건 개인이 정한 믿음에 불과하니 말이다. 나의 시선에선 어린 왕자가 틀렸고, 어린 왕자의 시선에선 내가 틀렸다. 그렇게 이 책을 읽기 전 어린 왕자와 다른 정답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충분한 어른의 시각에서 이 책을 읽기로 했다.


이해할 수 없는 어른과 이해할 수 없는 아이

"아저씨도 어른들처럼 말하네!" - 어린 왕자


어린 왕자는 집 한 채쯤 밖에 되지 않는 크기의 행성에서 떠나 다른 소행성들을 여행하며 다양한 어른들을 만나게 된다. 자신을 찬양하길 바라는 허영꾼의 행성,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 매일 술을 마시는 술주정뱅이의 행성, 숫자에 집착하는 사업가의 행성, 쉴 틈 없이 가로등을 켜고 끄는 일꾼의 행성, 하루종일 챙상에 앉아 별을 기록하는 지리학자의 행성, 그리고 이러한 어런들이 20억 명 가까이 존재하는 지구라는 행성까지. 어린 왕자는 여행 내내 이러한 어른들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다. 어린 왕자의 시선에선 어른들의 당연한 행동이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진짜 이상해." - 어린 왕자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 역시 어린 왕자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생명에 위협이 되는 뱀을 발목에 두르고 대화를 나누는 것과 쓸데없어 보이는 장미 한 송이를 위해 다시 소행성으로 돌아가려는 그의 행동을 우리 어른들은 이해할 수 없다. 어른의 시선에선 세상의 당연한 가치들을 깨닫지 못하는 어린 왕자가 그저 철부지 아이처럼 느껴질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규정한 가치들은 정말로 당연한 가치일까? 어른들의 세계에서 어른처럼 살아가는 것이 정말로 정답인 걸까? 그리고 우리 어른들은 정말로 이상한 존재일까?


어른에게 익숙한 정답들


"난 중대한 일을 하는 사람이다! 꿈같은 건 꿀 시간도 없어." - 사업가 

어린 왕자가 만난 이상한 어른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사람들이다. 그 이상한 어른들이 바로 우리 어른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른들은 모두 누군가의 명령에 따라 가로등을 켜거나 끄는 일을 반복하고, 하루종일 책상에 앉아 어떠한 의미인지도 모르는 숫자들을 기록한다. 또, 누군가 자신을 찬양하길 바라지만 누군가를 찬양하지는 않고, 가끔은 술을 먹는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곤 한다. 우리는 이러한 행동들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믿으며, 위와 같은 행동들이 중대한 일이라는 믿음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사람들은 허겁지겁 급행열차에 올라타.
 정작 자기가 무얼 타고 있는지 알지 못하면서.
그냥 불안에 떨며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어.
그럴 필요 없는데." - 어린 왕자

그러나 나는 익숙한 정답만을 추구하는 어른들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만은 않는다. 이 세상에 올바른 정답은 없지만, 그렇다고 익숙한 정답이 틀린 것은 아니다. 어린 왕자의 물음에 어른들은 자신의 삶을 성찰해 볼 수는 있지만, 수 세기 동안 쌓여온 인간에 대한 탐구와 사회가 만들어진 과정을 무시할 순 없다. 우리가 만들어낸 익숙한 정답은 대부분 옳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우리가 경계해야 할 부분은 어린 왕자가 말한 것처럼 자신이 무얼 타고 있는지도 모른 채 급행열차에 오르는 것이다. 아무런 생각 없이 수동적으로 정답을 따르는 것은 진정한 어른이 아니다. 


당연한 어른이 되어버린 세상의 어른들


"마음으로 봐야 보인단다.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거든." - 여우


우리는 비로소 어른이 되어야 이 책을 이해할 수 있다. 기계처럼 가로등을 켜고 끄는 행위는 우리가 어렸을 적 바라던 꿈이 아니었다. 사업가가 집착하는 숫자만이 우리의 가치가 아니었다. 책상에 앉아 책을 보는 것만으로 세상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이 정한 '당연함'이 정답일 것이라고 믿으며 어린 왕자를 미성숙한 존재로 취급한다. 진정한 성숙함이란 무엇인지 생각해보지도 못한 채 당연한 어른이 된 것이다.


나 역시 어른이기 때문에 이 책을 다 읽은 뒤 어린 왕자에게 냉소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흥, 어린 왕자 네가 뭘 안다고 그래. 너 역시도 어른이 된다면 별 수 없이 현실을 받아들일걸?'하고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어린 왕자에게 부러운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이제는 더 이상 어린 왕자가 내뱉은 말에 100% 공감할 수 없다는 사실에,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의 그림이 모자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참을 수 없는 부러움이 몰려왔다. 그래도 어린 왕자가 내뱉은 문장들을 수집하며 마음이 동요되는 것을 보니 아직 나도 완벽한 어른이 되지는 않았나 보다. 아직 미성숙한 어른이라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끼며, 내 안의 어린 왕자를 잃지 않도록 가끔은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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