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에는 봄이 오면 제일 먼저 피는 꽃이 벚꽃만 있는 줄 알았다. 가족의 봄맞이 중요행사는 창경원 벚꽃놀이였고, 전쟁 중에 부산으로 피란 가서 피란민 생활을 할 때도 어른들한테서 진해의 벚꽃놀이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봄이 되면 벚꽃이 피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느라고 벚꽃 보다 먼저 피어서 우리에게 봄소식을 일찍 전해주는 꽃들이 많은데 한참 동안 그 사실을 모르고 자랐다. 산수유, 매화, 살구꽃, 개나리, 진달래 등이 있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매화나 산수유는 남쪽에서 일찍 피어 봄소식을 전할 뿐만 아니라 그 열매들이 식용이나 약용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사람들이 축제까지 열며 인위적으로 많이 재배하여 관광상품으로도 각광을 받고 있으나 이에 비해 개나리와 진달래는 길가의 축대 위나 야산에서나 볼 수 있는 야생화처럼 취급을 받아 소홀한 대접을 받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진달래를 보려면 등산을 해서 북한산이나 청계산의 능선처럼(요즘엔 고려산도) 높은 곳에나 올라가야 겨우 볼 수 있기 때문에 특별하고 귀한 꽃으로 생각되기도 하였다.
이제 더 이상 높은 산으로 등산할 수 없는 우리는 봄맞이를 하려면 낮은 곳에서 진달래 명소를 찾아야 한다. 다행히 몇 년 전에 부천 원미산 자락에 진달래동산이 생겨 쉽게 진달래를 실컷 감상하고 온 적이 있고 가까운 국립박물관 후원에서도 다른 곳보다 일찍 핀 진달래를 많이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런데 소문난 곳에는 당연히 사람들이 몰릴 것이므로 오늘 우리는 조용히 진달래 구경을 할 수 있는 곳으로 가기로 한다. 검색해서 발견한 곳이 바로 서울 강북구 오패산 자락에 있는 오동근린공원의 진달래능선과 북서울꿈의 숲이다.
4호선 미아사거리역 1번 출구에서 모였는데 모두 열다섯 명이나 된다.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도 있었는데 꿈의 숲이라는 제목이 좋았나? 예전에는 드림랜드라는 사설 놀이공원이었다가 시립공원으로 바뀌면서 지금은 북서울꿈의 숲이라고 부른다.
역에서 나와서 넓은 도봉로를 따라가면 네거리에서 오현로를 만나고 우회전하여 오현로로 20분쯤 올라가면 북서울꿈의 숲 서문 앞에 도착한다.
오늘은 꿈의 숲에 곧장 들어가지 않고 서문 건너편에 있는 오동근린공원에 먼저 들리려고 한다. 이곳에 진달래 능선이 있기 때문이다. 공원입구에 있는 골프장 옆의 산길을 올라가니 얼마 가지 않아서 곧 진달래 군락지가 보인다.
와! 오늘은 우리가 진달래 만개시기에 때맞추어 왔다. 작년과 재작년 두 차례에 걸쳐 내가 이곳에 왔을 때는 이미 시기가 지나서 진달래꽃이 시들어 가고 있었는데, 오늘은 진분홍, 연분홍의 수많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서 아름다움을 한창 뽐내고 있다. 주변을 둘러싼 푸른 소나무숲과 어울려 감탄이 절로 나오는 풍경을 이룬다. 때마침 내리는 보슬비에 꽃잎이 더욱 싱싱하다. 이 아름다운 장면을 조금이라도 더 붙들어 두려고 감탄사를 연발하며 사진을 찍느라고 카메라여인들은 매우 바쁘다.
모두 진달래꽃에 취해서 아쉬워하며 진달래능선을 내려와 다시 꿈의 숲 서문 앞에 선다. 서문 근처에는 전망대와 아트센터등 시설이 많이 서있다.
북서울꿈의 숲에는 이미 여러 번 와 보았지만 오늘 같이 꽃 필 때를 맞추어 온 적은 없었다. 이곳 벚꽃도 유명하다던데 벚꽃은 다음 주나 되어야 필 것 같다.
드문드문 진달래와 개나리가 보이길래 우선 점심부터 먹고 공원을 둘러보기로 한다. 작은 연못(아직 물이 채워져 있지 않다) 앞에 이태리식당이 있고 여러 가지 메뉴가 있어 각자 키오스크에서 주문할 수 있다.
점심 후에 공원을 둘러보는데 길옆에 개나리 동산이 보인다. 만개한 개나리가 화사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 오늘은 개나리도 보게 되니 작년에 가 보았던 응봉산 개나리동산을 올봄에는 건너뛰어도 될 것 같다. 개나리 언덕 맞은편에 오른편으로 월영지라는 연못이 있는데 연못 가에 아직도 남아있는 작년 가을의 마른 갈대가 보슬비 내리는 연못에 운치를 더해준다.
이 연못을 돌아 내려가는 길에 나무는 보이지 않는데 갑자기 매화 향기가 그윽하게 코끝으로 스며든다. 세상에! 언덕 아래에 매화나무가 무리 져 서있고 매화꽃이 활짝 피어 있지 않은가? 지난주 경인아라뱃길 매화동산에서는 매화꽃망울만 보고 와서 아쉬웠는데 오늘 여기서 이렇게 만개한 매화를 볼 줄 몰랐다. 매화까지 감상하고 내려오는 길에 창녕위궁재사라는 한옥 건물이 있지만 안마당에서는 특별촬영을 하는지 들어가지 못하게 하여 밖에서만 보고 지나간다.
오늘은 진달래부터 개나리, 매화, 산수유까지(돌틈 사이에 핀 제비꽃도) 봄꽃을 한꺼번에 보게 되어 모두들 행복해한다. 그런데 하루종일 보슬비가 오다 말다 하며 계속 하늘이 흐렸으니, 날씨가 개어 파란 하늘까지 보았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라고 내가 말하자 어떤 친구가 오늘은 더 바라지 말자고 한다. 맞다! 오늘 하루에 본 모든 것에만 감사해야겠지?
돌아갈 때는 북서울꿈의 숲의 동문으로 나가서 장위동, 월곡동, 석관동이 떠오르는 돌곶이로를 따라 20분쯤 걸어가다가 돌곶이역(6호선)까지 가서 여기서 헤어진다.
집에 도착하니 만 삼천보 조금 못 걸었다.
2024년 3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