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디자이너 라니씨가 추천하는 4월의 산책코스
부끄러운 말이지만 진달래를 스무 살이 넘을 때까지 동요나 시, 그림에서나 보고 들었지 실제로 본 기억이 안 난다.
도심 대로변 상가주택에서 어린 시절 거의 20년을 살다가 드디어 마당 있는 집으로 이사 간 뒤 그제야 진달래꽃을 볼 수 있었다.
앞마당 한켠에서 처음 진달래꽃이 아름답게 핀 것을 보고 크게 감동했던 우리 형제들은 이리저리 꽃 앞에서 열심히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했다. 때는 1970년대초여서 우리나라에도 컬러 필름이 일반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해 컬러 사진으로도 인화하여(그전까지의 앨범에는 흑백사진만 있었다) 진달래꽃의 진분홍색을 사진으로 다시 한번 더 감상할 수도 있었다.
그 후 30년이라는 오랜 세월 해마다 4월이면 직장에 다니느라 바빴기 때문에 진달래꽃을 그리워하기만 하고 여유 있게 감상할 수 없었다. 그러다 퇴직을 하고 친구들과 걷기 모임을 시작하게 되니 봄이면 자연히 꽃길을 찾는다.
북한산과 청계산 진달래능선이 유명했지만 우리는 청계산에 자주 가서 진달래를 즐겼다. 이제는 청계산도 오르기 힘들다는 친구들이 생겼다. 그러던 차에 눈에 뜨인 것이 서울 근교 원미산에서 열리는 진달래 축제였다. 등산로 초입에 진달래공원이 드넓게 펼쳐져 있어 힘들게 높은 산을 오르지 않아도 진달래를 실컷 보고 올 수 있었다. 그다음에는 용산 박물관 정원을 걸으며 오솔길의 진달래를 보고 탄성을 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올봄에는 날씨가 따뜻하여 매화꽃 지고 나자 그다음에 필 봄꽃들이 예년보다 열흘이나 일찍 모두 한꺼번에 피었다가 져버리니 꽃구경 일정 잡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며칠 전에도 벚꽃 없는 벚꽃길을 걷고 왔으니…
그래도 어딘가 진달래가 늦게까지 남아있는 곳이 있겠지, 생각하고 검색해 보니, 강북구 오동 근린공원에 있는 진달래능선에서 진달래를 보고 왔다는 글이 보인다. 지도에서 찾아보니 오동근린공원은 오패산 자락에 있고 북서울꿈의 숲 서문 건너편이다. 북서울꿈의 숲은 우리 모임에서도 여러 번 다녀간 곳이라서 일주일 전만 해도 아름다웠을 벚꽃길을 오늘은 그냥 지나가기로 한다. 오늘은 진달래를 보러 가기로 했으니까.
서문 앞 횡단보도에서 길을 건너니 진달래 능선 가는 길이라고 표시가 있다. 금방 숲길이 나오고 20분쯤 더 오르니 진달래능선이 환하게 열린다. 역시 이곳 진달래도 절정기를 지나서 꽃잎들이 빛을 많이 잃었으나 아직 그 화려함을 간직하고 있다. 서울에 이런 진달래동산이 숨어있다니! 주변의 소나무 숲과 갓 피어나기 시작한 나뭇잎의 연푸른 색이 어울려 그지없이 아름다운 풍경이다. 올봄의 마지막 진달래를 보며 흐뭇한 마음으로 산을 내려오는데 내려오는 길옆에 철쭉나무들이 자신들도 곧 꽃필 거라고 시위하듯 꽃망울을 잔뜩 부풀리고 있다.
2023년 4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