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디자이너 라니씨가 추천하는 5월의 산책코스
오늘은 여고 총동창회에서 주관하는 남이섬 문화탐방이 있는 날이다. 마침 목요일이어서 우리의 걷기 모임 친구들도 함께 참여하기로 했다.
남이섬은 우리의 청춘 시절에, 즉 1970년대 초에 가족들과 학생들의 소풍지로, 젊은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부상하던 곳이었다. 경춘선 기차나 시외버스를 타고 가평역에 내려 가평나루에서 배를 타면 남이섬에 갈 수 있었다.
신록이 눈부신 잣나무길이나 메타세쿼이아길을 걷다가 길 끝 강변에 이르면 북한강의 강물과 강 건너 산들이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다. 그래서 남이섬이라면 젊은 날의 개인적인 추억과 함께 오랫동안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던 섬이었다.
그러나 그 후 몇십 년 동안 이곳을 잊고 지냈는데 2000년대 초에 와서 드라마 영화 "겨울 연가"의 촬영지라고 남이 섬이 소문이 나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 이섬이 너무 유명해지고 사람들이 많이 몰려든다는 소식이 자주 들리므로 한동안 나에게 남이섬은 유명 연예인처럼 가까이 가기에 좀 먼 곳이 되었었다.
그러다가 십여 년 후 어느 늦은 가을날 친구들과 함께 설악산 여행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오래간만에 남이섬에 한번 들려보자는 한 친구의 제안에 그리로 차를 돌린 적이 있었다. 그때 설악산에는 이미 단풍이 다 지고 난 후였으나 남이섬에는 아직도 붉은 단풍이 남아 있어 좀 더 늦가을 정취를 즐길 수 있었다. 은행나무길에는 샛노란 은행잎이 수북이 덮여있어 마치 황금색 카펫을 깔아놓은 듯 낭만적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했다. 그런데 그 길에 쌓인 은행나뭇잎들이 서울의 송파대로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세상에! 서울에서 온 은행잎이라고…?
가을이면 은행나무길이 유명한 송파대로에서 떨어져 쓰레기가 돼버리는 은행잎들이 이곳 남이섬 은행나무길에 버려져서 재활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관광객들과 사진애호가들이 즐겨 찾는 사진촬영지가 되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은 산책 중에 우연히 만난 당시 남이섬의 경영자 K대표로부터 직접 들어 알게 됐다. 그분은 마침 함께 간 친구의 지인이었던 것이다. 그분과의 우연한 만남은 우리 일행에게 진정으로 행운이었다.
그는 남이섬을 세계적 관광지로 만든 자신의 경영철학을 상세히 재미있게 이야기해 주었는데, 그의 아이디어는 매우 참신하고 창의적이었고 유머와 재치가 넘치는 그의 언변은 듣는 우리를 감동케 했다. 쓰레기를 재활용해서 이렇게 멋진 공원을 만들다니! 설명을 듣고 다시 보니 구석구석에서 그저 감탄이 나올 뿐이었다. 버려진 소주병들이 예술작품이 되고 죽은 고사목은 뒤집어 세워져 설치미술작품이 되는 등 그 수가 너무 많아 일일이 나열할 수도 없다.
그날 대표님에게 그의 저서와 직접 그린 새해 달력까지 선물로 받아 들고 나오면서 정말 가슴이 뿌듯했었다.
그 후에도 한 두 차례 늦은 봄날에 남이섬을 방문한 적이 있었고 오늘 또 오래간만에 다시 남이섬 문화탐방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코로나 방역 조치가 해제된 후 처음 맞는 봄이어서 그런지 평일인데도 남이섬은 관광객으로 넘친다. 여전히 인기 관광지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학생단체들 뿐만 아니라 외국인 관광객들도 참 많이 보인다. 몇 년 사이에 나무들은 더 커지고 푸르러지고 드넓은 잔디밭도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벚꽃의 계절은 지났지만 아카시아 향기가 아직 남아있고 반짝거리는 신록의 나무들이 산책길에 서늘한 그늘을 드리워준다. 새로운 구조물과 시설도 많이 생긴 것 같고 걸을 곳도 많았지만 허용된 시간이 짧았으므로 매우 아쉬워하며 강변 벚나무길을 좀 걷다가 남이 장군묘(이곳의 묘는 가묘라고 하고 진짜묘는 경기도 화성에 있다고 함)를 지나서 집결지인 선착장으로 향한다.
반세기 전 청춘시절의 데이트 코스를 추억하며 그때의 나무들이 여전히 늠름하고 푸르게 잘 자라고 있음에 안도하면서 돌아오는 배 위에서 멀어져 가는 남이섬을 보며 떠난다.
2023년 5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