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디자이너 라니씨가 추천하는 8월의 산책코스
오늘은 비가 내릴 거라는 예보가 있었다.
그런데 어제 많은 비가 내렸기 때문에 오늘 비의 양이 많을 것 같지는 않다.
어쨌든 비가 많이 오면 야외산책은 오래 할 수 없으니 박물관 산책도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가 만나는 시간에 폭우가 온다면 박물관으로 들어가고 그렇지 않으면 밖에서 걷기로 한다.
그래서 만나기로 한 곳이 이촌역이다. 강변 아니면 박물관을 걸을 수 있으니까.
아침에 일어나니 하늘은 흐리지만 비는 오지 않는다.
날씨도 어제 아침과 다르게 훨씬 시원하다.
어제가 처서였는데 처서가 지나서 그런가 오늘 아침에는 선풍기가 필요 없을 정도이다.
이촌역으로 가니 열다섯 명이나 모인다. 가까워서 많이 모이나? 어쨌든 비가 오지 않으니 노들섬을 향해 우선 한강변을 걷기로 한다.
노들섬은 한강 가운데 한강대교의 중간에 있는 섬으로 백로들이 와서 놀던 돌, 노돌에서 그 이름이 왔다고 한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이 다리 아래의 한강백사장에서 여름에는 물놀이를 하고, 겨울에는 스케이트를 탄 적도 있지만 성인이 되어 몇십 년 동안 한강대교는 우리에게 자동차만 타고 건너 다닐 수 있는 다리였다. 그 다리 중간에 노들섬이라는 섬이 있고 버스정류장도 있어 여기 다리에서 섬까지 내려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도 얼마 되지 않는다.
이촌역 4번 출구에서 나와서 이촌동 아파트 사이의 길로 직진하면 이촌한강공원으로 가는 팻말이 보이고 얼마 가지 않아서 곧 한강변에 이른다.
토끼굴을 지나서 강가에 도착하면 강 건너 맞은편으로 흑석동과 현충원, 왼편으로 동작대교, 그리고 오른편으로 한강대교가 보인다. 그 아래로 노들섬도 보이고.
오늘은 강변을 따라 한강대교를 향해 걷는다.
이촌한강공원은 강변의 고수부지가 넓어서 녹지가 많고 산책길도 잘 되어있다.
하늘이 흐리고 보슬비도 잠깐잠깐 내리지만 강바람이 시원해서 걷기 좋은 날씨다.
미루나무라고 부르는 포플러 나무들이 높이 줄지어 서있어 그늘지고 운치 있는 오솔길을 따라가면 한강대교 아래에 도착한다. 여기에는 다리 위로 올라가는 계단과 승강기가 있다. 우리는 승강기를 타고 다리 위로 올라간다.
다리 위에 올라선 후 내 평생 걸어서는 건너갈 일이 없을 것 같았던 한강인도교를 따라 남쪽으로 걸어간다. 노량진 쪽으로 약 500 미터쯤 걸어가니 노들섬 버스정류장이 보인다.
버스정류장에서 연결되어 올라가는 계단이 있어 그리로 올라가니 큰 건물의 옥상 같은 곳이 펼쳐진다.
여기서 보니 멀리 여의도의 63 빌딩과 고층건물들이 반짝이고 강 건너편으로는 이촌동의 아파트들이 빽빽하게 서 있다.
우리가 올라선 곳은 거대한 복합문화공간 건물의 2층이다. 2층에 식당 몇 집과 화장실이 있고 1층에는 북카페, 갤러리등 문화시설이 있다. 1층 앞으로 펼쳐진 잔디밭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공연장의 객석으로도 사용할 수 있게 좌석을 만들어 놓았다. 이번 주말에 무슨 공연이 예정되어 있는지 사람들이 시설을 준비하느라고 분주하게 다닌다.
잔디광장을 지나 물가로 내려가니 버드나무 아래 쉴 수 있는 벤치와 테이블도 몇 개 놓여있다.
우리가 물가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카메라를 손에 든 젊은이들 여럿이 몰려온다. 어느 학교 사진반 학생들인가 했더니 낯익은 연예인의 얼굴도 눈에 뜨인다. 아마 방송국에서 나온 촬영팀인가 보다. 촬영하는데 방해하지 말자고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섬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한다.
시계방향 반대로 돌아서 섬의 동쪽 끝으로 가니 전망이 기가 막힌다. 넓은 한강의 양편으로 강북과 강남의 서울 풍경이 한꺼번에 장대한 파노라마를 이루고 있다. 개인적으로 대도시 풍경을 그린 그림이나 사진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여기서 보는 서울은 이국적으로 보일 정도로 정말 아름답다. 하늘까지 맑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런데 동쪽 물가에 비어 있는 시멘트 평지가 있어서 알고 보니 헬리콥터 착륙장이란다. 언제 사용하는 곳일까? 헬기 착륙장 옆에는 옹벽이 높이 쌓여있고 그 위로 검푸른 숲이 보인다. 그 숲이 궁금하여 올라가 보고 싶지만 올라가는 계단이 없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숲은 노들생태숲이라고 하며 학습 목적으로 특별히 예약을 해야만 탐방할 수 있다고 한다. 나무들이 울창하여 그 숲이 꽤 유혹적이던데…
노들섬은 크지 않은 섬이어서 한 바퀴를 걸어서 다 돌아도 채 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이촌역에서부터 걸었어도 한 시간 반쯤 걸었나? 오늘 걷기는 그 정도로 만족하고 이 복합건물 2층에 있는 한강 전망이 아주 좋은 이태리 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간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은 노들역에서 탄다. 노들역에 가기 위해서는 한강대교를 넘어가는 연결통로로 반대편으로 가서 다리를 건너가는 것이 편리하다. 노들섬에서 상도동 쪽으로 건너가려니 다리 초입에 "단기 4291년"에 복구되었다고 적힌 동판이 서있다. 단기 4291년이라면 서기 1958년으로 우리가 국민(초등) 학교에 다닐 적에 사용하던 년도로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숫자이다. 한강다리는 1917년에 처음 건설하였지만 1950년 6.25 전쟁 때 폭파되었다가 1958년에 인도교를 완전 복구했다는 말이니 오늘 우리는 서울에서 제일 오래된 한강대교를 걸어서 건넌 셈이다. 실제로 이 한강인도교를 제1한강교라고 부른 적도 있었다.
한강대교를 다 건너면 노들역 가기 직전에 왼편으로 우리가 작년 가을에 다녀왔던 용양봉저정과 그 뒤쪽 푸른 언덕 위에는 요양봉저정 공원도 보인다. 자동차를 타고 지나갈 때는 잘 보이지 않았는데 걸어가면서 찾아보니 눈에 잘 뜨인다. "노들강변 봄버들~~" 노래에 나오는 강변의 버드나무는 달리는 차들로 꽉 찬 올림픽대로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
집으로 갈 때는 9호선 지하철이 정차하는 노들역에서 모두 헤어진다. 비도 안 맞고 해도 뜨겁지 않아 잘 걸었다면서 인사하는 얼굴들이 비교적 만족한 듯 보인다.
최근에 들은 소식에 의하면 노들섬을 새로 정비할 계획이라는데 새로 만들어질 노들섬은 공상과학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너무 초현대적인 인공미만 강조하지 않고 자연미 넘치고 그늘 많은 푸른 노들섬이 되었으면 좋겠다.
2023년 8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