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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ee Jul 13. 2022

한 달간의 도피, 그 후엔

도망의 끝에는 새로운 시작이


알림 소리가 오늘따라 유난스럽게 날 재촉한다. 해 뜰 때까지 논 보답으로 얻어진 눈꺼풀 위의 돌덩이들이 느껴진다. 이것들을 털어내며 무거운 눈을 떴다.


지금 안 일어나면 캐리어를 쌀 시간이 없어!

졸린 눈을 비비며 캐리어 앞에 섰다. 눈앞에 한 달간의 흔적이 보인다. 오늘이 벌써 마지막 날이라니. 처음 일주일은 일정한 속도로 하루하루를 지나쳐 갔는데 2주 차부터는 기어가 자기 혼자 풀려버려 생각지도 못하게 목적지에 빨리 도착한 느낌이다.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간 것 같은 약간의 아쉬움. 한 달간의 휴식 대신 부담감을 주었던 팀별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시원함. 서울로 돌아가면 현실과 마주쳐야 한다는 두려움. 이 세 가지를 마음에 이고 처음보다 몇 배로 불어난 짐을 몸에 지었다.


팀원들과 함께 버스로 향하는 발걸음에도 아직은 실감 나지 않는 것 같다.


무거운 짐들을 드디어 버스에 었다. 눈물 배웅을 해주는 팀원들의 인사를 보니 이제는 조금 실감 나는 것 같다.


벨트를 모두 착용해주세요.
도착 전까지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어야 합니다.

버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와 함께 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이제 진짜 서울로 가구나. 그동안 고마운 마음을 듬뿍 담아 그들에게 손을 며 그들의 시야에 사라졌다.



피곤함에 몰려있던 나는 긴 생각보다 커다란 꿈속의 공상으로 빠지고 싶었다. 28일쯤 되니 엄마 아빠도 보고싶고, 속초에서도 갈만한 곳을 다 갔기에 이만하면 엄청 아쉽지 않다고 급하게 생각을 정리하였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들어 두 귀에 꽂고 묵직한 짐들 사이에 다리를 내려놓은 후 눈을 감았다.


더 이상 네 안에 그 일은 없던 일
그래서 아픈 기억 모두 버려야 할 일
눈물짓지 마, 새로운 오늘을
맞이할 준비를 해봐

외로운 날들이여 모두 다 안녕-
내 마음속의 눈물들도 이제는 안녕-
어제의 너는 바람을 타고 멀리
후회도 없이 미련 없이 날아가

조이-안녕


귓가에 흘러오는 멜로에 잠이 깼다. 창문에 반짝이는 빛이 스쳐간다. 밖에서 흘리는 눈물이 조금 부끄러운 나는 고개를 창문 쪽에 떨구었다.


지금 흐르는 눈물의 의미는 이별의 슬픔도, 현실과 다시 마주쳐야 하는 두려움도 아니다.


잠시 동안 잃어버렸던 나를 다시 찾은 것만 같은 희열감이었다.


속초에 모인 각기 다른 나이와 직업군을 가진 13명은 한 달 동안 이곳에서 휴식만을 하는 것이 아닌, 팀별 프로젝트를 이루어냈어야 했다.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사진가, 기획자. 밸런스가 완벽한 4명으로 이루어진 우리팀은, 20대의 여행자와 60대의 현지인이 자신만의 스타일대로 속초 여정을 하면서 새로운 속초의 모습을 발견하는 인쇄물 [매거진]을 제작하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패션 잡지를 좋아했던 나는 대학생이 되어서도 나만의 잡지와 책 디자인을 할 때 가장 작업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었다. 이를 버리고 현실과 타협하기 위해 인쇄물과 정반대인 IT기업에서 아픈 감정만 키워냈는데. 이곳에서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니. 너무나 짧은 시간 탓에 새벽 작업이 불가피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제야 할 맛 난다는 생각이 내 머리를 지배하였다.


그리고 나의 여행 한정 취미였던 사진 촬영이 매거진 작업에 큰 힘이 될 수 있다니. 매거진 제작을 위한 사진 촬영 날, 하늘이 변덕을 심히 부린 날이었다. 사진의 좋은 각도를 찾아내기 위해 팀원들과 비를 맞으며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몸은 부서질 것 같은데 이제야 잃어버린 재미를 찾았다는 생각이 내 온몸을 지배하였다.




그렇게 정말 짧은 시간 안에 팀원들과의 협력을 통해 모두가 만족하는 결과를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매거진이 우리의 품에 안겨졌던 날. 잠시 동안 느끼지 못한 특유의 종이 냄새와 질감을 맘껏 즐겨보았다.

1년이란 시간 동안 내가 나를 얼마나 과소평가했는지 한없이 작아져 있었는지 깨달았다. 매거진 디자인 총괄 작업과 사진 작업을 하면서 몸 힘들어도 너무 재밌었다. 인쇄를 받고 만져지는 종이의 촉감, 책의 냄새가 너무 그리웠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른 팀들의 프로젝트를 참여해보면서 그동안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들이 생겨났다.

지독한 멀미에 시달리는 나는 서핑을 하면서까지도 멀미를 한다는 것을, 오래 동안 찾고 싶었던 생각의 무소유를 명상으로 풀어낼 수 있다는 것을, 대역의 감정에 이입하여 큰소리 내는 낭독극이 스트레스를 푸는 취미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도 몰랐던 것을 알게 되었다.


잠시 잃어버렸던 것을 되찾는 것,

아예 몰랐던 것의 발견.


나는 그 두 가지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구나.

앞으로의 여정은 나도 확신하지 못하겠다. 근데 이제는 다시금 깨달았다. 깨달았기에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 그 것만 같다.






epilogue.

우리 딸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엄마도 너무 행복해

퇴사하자마자 속초로 떠난 나의 모습에서 지금의 나를 보니 확실하게 달라진 것 같다. 퇴사 직전에 불안했던 미래가 이제는 좀 정리가 된 것 같다. 당분간은 사진 + 편집  동반한 개인 프로젝트를 진행할 예정이다. 또한, 속초에서 만난 팀원들이 감사하게도 편집 디자인 결과물을 좋아해주어 디자인 외주 일이 들어오게되었다. 나의 개인 프로젝트와 외주의 일을 확장시켜 프리랜서로 전향할 생각이다. 지털 노마드를 늘 꿈꿨던 나에게 이 기회가 조금 더 빨리 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한 달 만에 누워 보는 나의 방 침대.

눈을 감아 나의 세상으로 빠지기 전 속초 살이 마지막 인사를 건냈다. 한 달 전은 불안에 짓눌린 슬픔이었다면 지금은 안도감의 눈물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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