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니와 여행을 함께 할 때면, 우리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는 주변인들이 늘 한결같은 질문을 던져왔다.
도대체 어떻게 엄마랑 단 둘이서 장기 배낭여행을 갔다 오는 거야??
3박 4일의 일본, 한 달의 유럽, 3주간의 쿠바와 미국까지.
이렇게나 자주라니. 그 어떤 누구와도 이렇게나 자주 여행을 함께한 적이 없었다. 이 정도면 서로를 치켜세우며 최고의 여행 메이트라고 칭할 수 있겠다만, 이렇게 되기까지 우리 또한 한바탕의 난리들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세계 곳곳에 새겨진 난리의 잔재 속, 드디어 모든 우연이 만들어낸 역대급 난리의 장소에 다다랐다.
한 달간의 여정의 끝, 이탈리아로 향하는 날로 돌아가본다.
.
.
.
ep16.
베니스 공항
한복판에서
잔잔한 분위기 속 혼자서 매일같이 폭풍전야를 만들어낸 이곳을 드디어 떠나는 날이 찾아왔다. 하루가 달리 갱신되는 바보짓에 지친 심신을 지닌 채 약간은 질려버리듯 짐을 정리한 뒤 밖을 나섰다.
어두컴컴한 새벽, 비좁은 골목 한가운데 떠나는 우리를 마중 나온 택시 한 대가 홀로 서 있다.
트램 소리가 일절 없는 고요한 골목길을 지나 어두운 공간 끝에 걸친 새하얀 빛을 따라 질주한다. 살짝 감겼던 눈 사이로 빛이 서서히 들어오기 시작할 때쯤 정신을 차리고 내릴 채비를 마친다.
드디어 마지막 유럽 여정이구만?
마지막 유럽 여정지로 향하기 위해 우리가 내린 곳은 리스본 공항이었다. 문화, 예술 볼거리가 다양하고 한국 직항이 활발한 이탈리아를 꼭 마지막에 두고 싶었기에 선택의 여지없이 비행기 이동을 행할 수밖에 없었다.
졸리 눈과 함께 하품을 쩍쩍하며 비몽사몽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새벽 5시의 공항도 역시 밖과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나 많은 체크인 키오스크를 나 혼자 쓸 수 있다니?
1초 부자 체험이 넓은 공항을 나 혼자 빌린 것만 같은 기분에 반쯤 잠이 깬듯하다. 어서 빨리 체크인을 하고 공항 안에서 맘 편히 기다려보자. 눈에 보이는 아무 체크인 기계 앞에 서서 가방 속에 고이 간직해 둔 여권과 파일을 하나 꺼내었다. 수많은 종이 틈 사이에 숨겨진 종이 한 장을 꺼내 예약번호를 하나씩 읊으며 숫자를 하나씩 눌렀다.
자 이제 비행기를 타러 가보쟛-!
해당 비행기 편은 현재 없는 비행기 편입니다.
..?응? 뭐야 내가 잘 못 눌렀나??
티켓발권 대신 처음 보는 팝업창 하나가 답을 해주었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나는 당연히 손가락이 엇나갔거나 숫자를 잘못입력했다고 생각을 하며 당황한 기색도 없이 다시 e티켓을 손에 움켜쥐고 차례로 예약번호를 입력하였다.
해당 비행기 편은 현재 없는 비행기 편입니다.
.....????왜 이래 나 진짜 제대로 입력했는데..?
똑같은 답변을 두 번이나 받은 이때부터 그제야 심각성을 인지한 듯 정수리부터 식은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하였다.
에이 설마 아닐 거야.. 내가 분명 돈도 다 내고 예약 영수증까지 프린트하고 왔는 걸..?
땀으로 흠뻑 젖은 손을 바지에 한 번 쓱 닦아내며 손가락 하나에 온 신중을 다해 천천히 번호를 눌러보았다.
해당 비행기 편은 현재 없는 비행기 편입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팝업창을 내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벙찐 채로 키오스크 앞에서 멍하니 서있었던 순간, 팝업창 아래 숨겨져 있던 일정표가 보였다. 허겁지겁 키오스크에 달라붙어 적혀있는 일정표를 한글자씩 읽어보았다.
비행기는 이미 어제 떴습니다..?
화면 속에는 아주 친절히 비행기 항공편을 보여주며 예약한 비행기가 이미 어제 떴다는 사실을 명확히 제시해 주었다.
또 시작이야 흑그글얽ㅇ거
으륵ㄹㄱ하하훟핳 나 이제 어ㄸㅓㄱ해..ㅐ..?
내 인생,, 실..화냐..?나의 실수였던 것일까? 아니면 항공사의 문제였던 것일까? 등에서 땀이 주르륵 눈에서는 눈물이 글썽글썽 차오른 상태로 꾸깃해진 종이를 한참을 바라보았다. 이상하다. 문제가 전혀 없다. 지금 내가 읊어보고 있는 E-티켓에도 오늘 아침 7시에 비행기가 뜬다고 적혀 있었다.
대체 무슨 이유에 의해 비행기가 먼저 떠났으며, 나는 왜 이를 전혀 몰랐을까. 이제는 눈물과 땀 대신 발끝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화를 도장 찍듯 걸으며 컴플레인을 걸기 위해 해당 항공사 고객센터로 빠르게 이동하였다.
아침 6시에 시작 예정
현재 시각 5시. 고객센터는 오픈 예정 펜말과 함께 굳건히 닫혀있었다. 주먹과 눈물을 머금으며 1시간을 용케 흘러 보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름 희망은 있었다. 비행기를 놓쳤으니 환불을 받거나 혹은 환불이 안되면 새로운 항공편 정보를 얻을 수 있겠다는 희망으로 1시간을 버텨냈다.
.
.
.
그렇게 한 시간 뒤, 눈물 콧물을 내뿜으며 공항 구석으로 밀려났고 내가 얻은 것이라고는 '나보고 어쩌라고 난 도울 수 있는 게 없어 따지고 싶으면 해당 항공사한테 이메일 보내'라는 시큰둥한 말과 해당 항공사의 명함뿐이었다.
공항구석에서 눈물 훔치기명함 쪼가리를 든 채 눈물 콧물만 하염없이 흘리며 고객센터 옆 구석에 앉아 혹여나 하는 마음에 메일함을 열어보기 시작하였다. 분명히 시간대가 바뀌면, 그것도 몇 시간도 아닌 날짜가 바뀌면, 당연히 메일이나 메시지로 고지해야 하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아닌가?하며 이마를 짚은 채 바쁘게 손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첫 번째로 내가 자주 쓰는 이메일에 들어갔다. 여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전에 남프랑스에 탔던 비행기 예약 메일만이 보였다.
설..마... 내가 다른 메일 주소는 쓴 건 아니겠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설마인 것 같다. 등골이 싸해지는 꺼림칙한 기분을 시원하게 느껴주고 공허한 눈으로 로그인을 한지 백만 년 지난 것 같은 메일함에 들어가 보았다. 이 메일로 말할 것 같으면 성인 이후로 써 본 적이 거의 없는 메일 주소였다.
왜 이제 왔어 주인장?들어가자마자 가장 첫 번째로 해당 항공사 메일이 나를 반겨주었다. 이놈의 설마는 역시 무서운 놈이다. 늘 변함없이 뒤통수 때린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메일을 클릭하였다.
승객 여러분 죄송합니다.
우리 항공편 시간이 바뀌었어요.
일정은 하루 앞당겨졌고, 비행기편도 바뀌었답니다.
원치 않으면 환불해 주세요.
이 메일이 2주 전에 1번, 한 달 전에 1번 무려 2번이나 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전혀 보지 못한 것이다.
멋지다, 나 자신아~~~~~
정~~~~말 장하다..^^유럽 내 나라 이동 중 비행기 이동이 2번이나 있어 이메일 확인을 수시로 하었지만, 하필이면 유일하게 이 비행기표를 예매할 때만 여러 이메일 중 내가 가장 안 쓰는 이메일로 하였다. 왜 그런 건지는 나도 진짜 모르겠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확인 조차 하지 않았었던 것이다. 말이 되는가? 누군가 운명을 사랑에 빠질 때 쓴다던데 바로 이런 것이 진짜 운명 아닐까 싶다. 아주 완벽하게도 비행기를 놓칠만한 서사였다.
잠시 잊고 있었던 우리 오마니는 어딜 갈 때마다 사고 치는 나의 옆에서 조용히 서터레스를 받고 있었지만 눈물 콧물로 불어 터진 딸랑구의 얼굴을 보아하니 애써 내색하지 못하고 감싸주기만 하였다. 포르투갈 때부터 쉴 새 없는 하드코어 사건들도 모잘라 비행기까지 놓치게 되면서 끝끝내 멘탈이 터져버렸지만, 어찌하리. 눈물 콧물은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지금 당장 스카이스캐너를 켜서 새로운 항공편을 예약하는 거였다.
나름 야무진 직항 저가항공을 예약하였으나 말로만 듣던 저가항공의 매운맛을 현장에서 맛보니 입안이 얼얼하였다. 현재 시각에서 가장 저렴하고 가장 빠른 저가항공을 찾아 헤매며 새로운 비행기 편을 예약하였다. 포르투갈에서 이탈리아, 비행기로 약 3시간 걸리는 짧은 거리에도 불구하고 무려 환승까지 하며 길을 돌아가야 하는 오합지졸 루트를 행해야 했다. 비행기값은 이전과 비슷한 가격으로 예매할 수 있었지만, 수하물부터 기내식까지 어느 무엇도 책정되지 않아 또 추가의 돈을 지불해야 했다. 돈은 돈대로 시간은 시간대로 아주 야무지게 날려먹으며 이 지긋지긋한 포르투갈에서 드디어 떠날 수 있게 되었다.
포르투갈 제발 좀 안녕
들어오는 것부터 나가는 것까지 하나도 쉬운 게 없었던 포르투갈의 일정은 화려하게 끝이 났다.
포르투갈의 여정은 드디어 끝이지만 이날의 하루는 이제 시작이 되었다.
얼굴에서 나오는 즙을 새벽 내내 짜내느냐 체력이 거덜 났던 나는 비행기 의자와 한 몸이 되어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잠을 자면 고민한 것들도 날아간다고 자고 일어나니 배라는 것이 고프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아무 생각이 없어진 듯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구나 시부럴저가 항공이었기에 기내식이 없었던 만큼 비행기에 내리자마자 무엇을 먹을지부터 탐색하였다. 아무래도 환승구역이다 보니 먹을 것도 사람들도 많았다. 바글바글 사람들 틈 속 눈에 바로 띈 것은 맥도날드였다. 햄버거를 참으로 좋아하는데 유럽에 와서 먹은 햄버거라곤 영국에서 먹은 쉑쉑버거가 다였다. 더 멀리 가기 귀찮기도 하고 오랜만에 햄버거나 먹자 싶어 맥도날드로 들어갔다. 나름 또 오랜만에 먹는다고 신중히 햄버거를 선택하고 수많은 인파로 늘어진 줄의 기다림 끝에야 첫 끼를 먹을 수 있었다. 입에 무언가가 들어가니 멘탈도 어느정도 회복이 된 것만 같다. 오마니랑 웃으며 '비행기 환승을 또 이렇게 처음 해보네~?' 하며 농담도 쳐본다.
햄버거를 먹다 보니 또다시 비행기를 탈 시간이 되었다. 지겨운 비행기에서 숙면을 다시 취하는 시간을 지새우려고 하는데.. 바로 내 옆에 탔던 할아버지 한 분이 말을 걸었다.
안녕, 너는 어느 나라 사람이니? 나는 크리아티아에서 왔어
갑자기 말을 건네오는 할아버지에 얼떨결 대답을 하다 한국에 대해 관심이 꽤나 많이 보였던 할아버지는 내가 듣고 있던 노래를 자기도 듣고 싶다고 영문도 모른 이와 이어폰 한쪽을 나눠 킨 채 베니스로 향하였다.
갑작스러운 프렌들리에 한껏 경직된 웃음그렇게 우리나라 노래 한곡을 듣고 크로아티아 노래를 듣어주고 싶다고 하셨는데 아쉽게도 할아버지 핸드폰 배터리가 없어서 들을 수 없었다. 피곤함 + 어색함 + 당황스러움이 곁들여졌던 나는 소통도 잘 못알아들어 거의 할아버지랑 고요속의 외침을 비행기 안에서 하다가 드디어 드~디어 이탈리아 베니스에 진입하였다.
쥴라게 보고싶었다 이탈이아약!!!
아침에만 해도 이곳에 올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는데 이곳에 오긴 왔구나.. 입을 틀어막은 채 감격을 하며 요란하게 입국하니 긴장도 풀어지는 듯했다.
긴장이 풀어지는 것도 잠시, 붉은빛이라곤 보이지 않는 어두운 시간대 속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또다시 분주해지기 시작하였다.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겠지만 와이파이가 터지는 이곳에서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베니스의 숙소 또한 에어비앤비였기 때문에 오전부터 미리 이 상황을 호스트에게 전달해야 했었다. 우리에게 숙소 키를 줘야 했기 때문에 우리의 도착한 시간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아침부터 호스트는 정확히 언제 도착하는지 메시지로 물었고 앞을 한치도 예상할 수 없었던 나는 공항에 도착하면 꼭 말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도착하자마자 호스트에게 허겁지겁 메시지를 건네고 두 번째 할 일인 공항버스를 찾기 시작하였다. 새벽부터 밖에 있었어서 배터리도 20%밖에 남지 않았던 상황이었고 하루 종일 우리를 기다린 호스트에게 너무 미안하여 머릿속엔 조급함으로 꽉 차 있었다.
그렇게 마음은 급했으나..
급하면 늘 새로운 문제가 창조되며 그 문제는 멘탈을 뒤흔들어 놓는다. 빠르게 가길 원했으면 돈을 더 주고 서라고 안전히 공항버스를 타고 갔으면 됐는데 이 와중에 돈을 아끼겠다고 일반 버스를 타기로 갑자기 마음을 먹은 것이다.
누가? 내가!!!!!!!!!
어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네..오늘만 해도 허비된 멍청비용만 해도 얼마인가.. 온종일 내 머릿속을 휘집고 다녔던 돈에 죄책감을 이기지지 못하고 눈앞에 있는 공항버스를 등져버린 채 구글맵에 적힌 길을 따라 공항 밖을 나섰다. 공항버스와 마을버스 이 둘만 해도 가격이 2배이상 차이가 나기에 현재의 정신 상태라면 이 짓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구글맵이 알려준 대로 가고 있었다. 공항 밖을 나가서 쭉 걷고.. 주차장을 지나서 도로 밖으로 나가라고..?
십 여분을 걷다 우리 눈앞에서 점점 사라지는 불빛에 겁을 살짝 먹으며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둘러보았다. 아무리 봐도 이곳에 버스가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들지 않는다. 불빛이 사라지는 두려움보다는 머리가 향하는 대로 직진하다가 멍고생을 맛보는 멍청 짓이 더 무서웠던 나는 이번만큼은 사람들에게 일일이 물어보며 걸어가기로 한다.
지금 가고 있는 길이 맞는 것 같은데..? 저리로 가면 돼
음.. 이분도 잘 모르는 것 같군. 이번엔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야겠다.
이쪽 길엔 없는데? 저리로 가면 돼
이게 웬 걸. 사람마다 나오는 말이 다 다르고 구글맵도 맛이 살짝 간 것인지 우리를 어두컴컴한 도로로 내보내려고 하였다. (매 여행마다 느끼는 거지만 대중적이지 않는 장소일수록 구글맵을 신뢰하면 안 된다.)
그렇게 우리는 힘겨운 몸을 이끌고 작지도 않은 베니스 공항의 외부를 시원하게 한번 훑어주었다.
이제는 나의 배터리에 빨간 불이 들어오고 참을 만큼 참은 오마니 신경에도 빨간 불빛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하루종일 온갖 실수를 지속하는 나 덕분에 편한 패키지여행 대신 별의별 고생을 다 맞보고 있었다. 이제 체력에 한계를 느낀 오마니는 한 마디씩 하기 시작하였고, 지속해서 울리는 호스트의 연락과 사망하기 직전의 나의 핸드폰 배터리 조합에 어쩔 줄 몰라하던 나는 그 자리에서 폭발하고 말았다.
두 번 다시는 엄마랑 절대 여행 안가!!!!!!!!!!!!!
너만 싫니? 나도 싫어 나도 너랑 두 번 다시 여행 가나봐라!!!!!!
그렇게 베니스 공항 외부 한복판에서 엄마와 나는 소리 지르면서 싸웠다.
.
.
.
씩씩거리며 빠르게 공항 안으로 들어왔다. 공항에 들어설 때마다 눈물범벅이라니 힘들다 힘들어. 분통이 차올라 우는 와중에도 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엉엉 울면서 공항버스 티겟을 예약하고, 끅끅 거리며 콘센트 앞에 앉아 핸드폰 충전을 하며 연락이 계속 오는 호스트에게 답장도 하였다.
울면서 할건다함엄마의 잔소리는 폭발의 시작점이 아니었다. 이미 이전부터 나의 마음속은 나에 대한 화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왜 이렇게 덜렁거릴까? 뭔가 하나씩 엇나가는 것일까? 어떻게 스페인 때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정상적인 날이 없지? 남들은 아무 문제없이 여행하는 거 나만 이상하게 여행을 하는데 이 정도면 내가 문제가 아닌가? 오늘따라 더 내 자신이 싫다.
길게는 스페인부터 이날까지. 짧게는 아침부터 지금까지. 하루종일 나의 큰 실수와 마주해야 했었다. 어쩜 이리도 바보 같은지 스스로가 이해가지 않았다. 지금까지 자책보다는 애써 경험으로 무마하려 하였지만 여행의 끝자락에서까지 실수하는 내 모습이 너무나도 싫었다. 무엇보다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으며 의지하고 기대고 싶었지만, 외국인들과 소통이 어려운 오마니를 챙겨야 했었고 컴플레인부터, 비행기 재예매, 길찾기, 호스트의 질문세례까지 모든 것을 혼자 다 감당하는 것이 나대로 벅이 차 이를 이기지 못하고 화를 분출해 버린 것이다.
돌고 돌아 겨우 찾아온 공항버스에 올라탔다. 나름 또 거하게 싸웠기에 오마니랑 나는 새침하게 돌아서며 서로의 반대편에 앉아 가는 내내 각자만의 창문만을 바라보았다.
급 어색해진 사이유치한 각자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서로 '내가 좀 심했나'라는 생각이 든 모양이다. 어쨌거나 모국에 나온 이상 의지할 사람은 나는 오마니, 오마니는 나였기에 도착지에 내리고 나서는 서로를 어설프게 챙기며 수상택시 매표소로 향하였다.
아니 근데 잠깐. 또 수상택시를 탄다고오?!
너네 대체 숙소에 언제 가니..? 어휴 지겨와정말 공항버스를 끝으로 무사 도착을 바랐지만 우리는 마지막으로 바다를 가로질러야 했다. 숙소가 하필이면 시내에서 먼 곳에 위치했던 것이다. 하루 만에 육해공을 누비는 것이 찐으로 가능할 줄 누가 알았을까.
이제는 진짜 진짜 끝이겠거니 매표소 앞에 섰다. 직원은 들리는 손님 모두에게 편도 티켓 말고 3일권을 추천해줬다. 우리 앞에 커플은 이를 듣고 한없이 고민했을 정도로 꽤나 부담스러운 가격이었지만, 방금 '돈 아끼려다가 멍고생한다'라는 삶의 교훈을 얻은 우리는 1초의 망설임없이 3일권을 구매하였다. 다 사람들이 추천하는 데에는,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나 자신아~!
검은색 물 위에 몇 안 되는 승객들이 탑승해 있다. 멀미에 심한 나이기에 배 밖을 바라보며 멀미를 이겨내고자 한다. 검은색 물 위에 미치는 붉은색 불빛들을 보아하니 하루가 정말 끝났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조금 더 시야를 멀리 떨구어본다. 시내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붉은 불빛들이 한없이 작아진다. 이 도시는 대체 어떤 도시일지 일말의 예측도 할 수 없다. 그저 지금 풍기는 비릿한 바다 냄새와 일렁이는 파도에 따라 움직이는 몸짓으로 섬에 오긴 왔구나를 체감만 할 뿐이다.
불빛이 내 시야에서 다시금 커지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드디어 도착을 하였다. 수상택시에서 힘겹게 발을 대디는 순간, 우뚝 서있는 한 남성 분이 가장 먼저 내 눈에 들어왔다.
처음 뵙지만 보고싶었습ㄴ다직감적으로 저분이 호스트이구나를 알 수 있었다. 얼굴을 보자마자 하루종일 기다리게 해서 너무나 미안하다는 말을 건넸지만 그는 너무나 친절하게 우리를 반겨주었다. 하루가 너무나 고단하였어도, 어떠한 사람도 나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어도 여행자로서의 환대는 이날도 어김없이 받을 수 있었다.
호스트를 따라 5분 정도 걸었다. 이곳은 슈퍼마켓 하나 안 보이는 주택가 그 자체였다. 사람냄새가 가득한 곳은 언제나 환영이다. 사람냄새를 따라 길을 쭉 걷다 보니 어느새 숙소에 다다랐다.
드ㄷ...어...도챡...기나긴 대장정 끝에 마주한 숙소 앞. 호스트는 친절히 열쇠를 열어주고 깨끗하면서도 아기자기한 숙소를 소개해주었다. 감격스러운 숙소를 입장하자마자 눈에 보인 것은 식탁 위 맛있는 간식 꾸러미였다. 점심 이후 한 끼도 못 먹었던 우리는 이 간식 꾸러미에 한없이 감동하며 1초에 한 번씩 땡큐를 퍼붓고 호스트를 떠나보낼 수 있었다.
이제 다사다난했던 하루가 정말로 끝이 난 걸까?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청소와 짐 정리를 한 후, 하늘을 갈라 3개의 공항을 지나쳐 어둠을 뚫고 버스를 타고 물살을 가르는 수상택시를 탄 하루라니. 심지어 그 정신없는 틈 속에서 비행기도 놓치고 싸우기까지 하였다. 정신적으로도 힘들었지만 왔다갔다 쉴 새 없이 이동하느냐 육체적으로도 고생이 많은 하루였다.
너무나 수고스러운 하루. 그리고 24시간이 이렇게 알차고 길수 있는가 싶은 하루. 호스트가 채워준 간식으로 간단히 배를 채운 후 재빨리 침대에 누워 이 길었던 하루를 빨리 끝내버리자.
오늘의 하루는 끝까지 나를 떠나보내주지 않았다. 이왕 고통을 준 거 제대로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는 침대에 누운지 얼마 안돼 오늘 새벽처럼 식음땀을 흘리기 시작하였고 배를 부여잡으며 온몸을 뒹굴고 있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예상치 못한 그분이 찾아온 것이다.
젭알 눈치라도 챙겨성인이 된 이후, 일상생활이 불가할 정도로 생리통이 극심해져서 생리통약을 넉넉히 챙겨 왔었다. 하지만, 한 달이라는 긴 여정 중 지지리도 운 안 좋게 2번이나 당첨되면서 내 손에 쥐어진 약은 딱 한 알 뿐이었다.
하 이걸 먹으면 내일은 어쩌지..
점점 더 심해지는 통증에 어쩌면 내일의 여행이 불가능하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마니가 가장 오고 싶었던 곳 중 하나가 바로 베니스였기에 내가 아프면 안 되었다.
내가 없으면 오마니 혼자 여행이 불가하잖아..?
이제는 고민도 귀찮다. 더 긴 고민대신 빠르게 마지막 남은 약 한 알을 집어삼켰다.
이제부터 통증이 잠재워지려면 30분을 흘러 보내야 한다. 30분을 더 고통을 감내한다. 전보다 식은땀이 미친 듯이 흐르는 딸랑구가 너무나 안쓰러웠던 것인지 오마니는 조용히 따뜻한 손으로 딸의 배를 어루 만주어 주었다. 어렸을 때부터 더운 여름에도 가리지 않고 찾아 헤매던 따뜻하고 보드라운 엄마의 손은 크고 나서도 똑같이 따뜻했다. 그리고 엄마는 끙끙 앓는 딸을 등지고 침대에서 일어나 캐리어 속 작은 수건을 하나 꺼내 전자레인지에 뎊혀 만든 간이식 핫팩을 내 배에 올려다 주었다.
엄ㅁ..ㅏ.. 고마워..ㅠㅠㅠㅠㅠ
어휴 이것 봐 엄마랑 여행같이 가니 좋지? 다음에도 같이 갈 거지?
극심했던 고통이 따뜻함에 조금씩 사그라지기 시작하였다. 이제는 정말 오늘 하루를 편히 떠나보낼 수 있겠다. 오늘의 하루는 마지막까지 나를 떠나보내기 싫어한 것 같았다. 어쩌면 이 하루는, 유럽 여정 속 오늘과 같은 시련이 다가올 때마다 마주하는 우연한 만남을 그리고 그 속에서 느꼈던 따뜻함이 못마땅해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오늘따라 유난히 어떠한 사람의 도움도, 어떠한 우연의 상황도 따라주지 않았던 24시간을 선물한 이날의 하루. 하지만 멀리서 온 우리를 끝까지 기다려주는 것도 모잘라 웃음과 간식더미로 맞이해 준 호스트와의 만남과 딸의 아픔에 맘 편히 잠 못 드는 모성에 그도 어찌할 수 없었나 보다. 길게도 괴롭힌 하루의 끝에는 고통 대신 따뜻한 온기만을 남긴 채로 그는 완벽히 떠나버렸다.
.
.
.
epilogue.
사고에 사고를 이은 여정의 하루가 드디어 끝이 났다. 유럽여정에서 도시를 이동할 때마다 매번 새로운 방법으로 사고를 치는 사고뭉치 일화도 이날을 정점으로 끝맺을 수 있었다. 그리고 소리소문 없이 떠나 날려버린 비행기값 또한 한국에 돌아와서 무사히 환불받을 수 있었다. (ep.1 [쿠바] 하나의 비행기 값을 2배의 값으로 참고)
베니스 광장의 끝, 바다누군가와 '함께' 여행을 한다는 것. 24시간 내내 새로운 장소를 함께 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음식부터 잠까지 일상의 패턴이 맞아야 하고,
쌓아두지 않고 적당히 감정을 표현하며 풀 줄 알아야 하며,
예상치 못한 사건사고에 서로를 탓하지 않고 나의 일처럼 함께 이겨내야 한다.
그리고 여행에서 추구하는 가치가 맞아떨어져야 원하는 곳을 함께 걸어 나갈 수 있다.
엄마랑 딸, 모녀 둘이서 여행하는 거 어렵지 않아요?
김치를 원체 안 먹는 딸과 한식을 유난히 찾지 않는 엄마
새로운 음식에 거리낌이 없는 딸과 커피만 맛있으면 되는 엄마
아무 곳에서나 잘 자고 잘 적응하는 딸과 이것도 다 경험이라는 엄마
체력이 약한 딸과 점심 먹고는 숙소에서 쉬어야 하는 엄마
혼자서도 잘 노는 딸과 이국의 숙소에서 필사를 즐기는 엄마
사람들과 금방 친해지는 딸과 사람과의 만남을 감사할 줄 아는 엄마
아이를 좋아하는 딸과 아이를 품어주는 엄마
그리고 가족이기에 감추는 표현없이 다 뿜어내며 싸우다 늘 그랬듯이 금방 풀어지는 두 모녀.
가장 나다워지는 여정 길에서 나를 가장 과감하게 보여줄 수 있는 그런 동행.
엄마, 아빠, 오빠, 나 4명이서 어릴 때부터 쭉 국내 여행을 자주 다녔지만,
아빠와 오빠 서운하게 지금도 엄마랑 나는 둘이서 호캉스나 제주도 등을 다닌다.
이상하게 그 어떤 여행메이트 중 가장 편하다.
모녀라서 그런지 현지인, 여행객들 모두 우리를 의심스럽게 보지 않고 특히나 여행 중 아이들이 많이 꼬인다는 특장점이 있다. 물론 불편한 점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십몇 년 함께한 세월을, 세계 곳곳에 흩뿌려진 발자취를 무시할 수 없나 보다.
아무래도 나에게 최고의 여행메이트는 엄마인듯하다.
엄마, 다음 여행도 함께 해줄 거지?
-
23년 6월부터 로컬 여행자의 여정기를 소개하는 뉴스레터를 발행하고 있습니다 :)
매주 목요일마다
한 달에 1명의 여행자씩
짧고 간결하게
정보성이 아닌 '이야기'를 중점으로
여정의 길을 늘 갈망하는 이들에게 재미난 에피소드로, 일상의 지루한 틈을 타 짧은 여행을 보내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그 경험이 모여 지금 당장 여행을 떠나게 만들어 주는 동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여행의 이야기들을 모아, 지금 바로 move or action!
https://maily.so/moa.travelz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