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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실수로 인한 거대한 번짐 그리고

새롭게 경험할 회복함을 기대하며

by greenee



1970년대에 발달심리학자인 존 플라벨(J. H. Flavell)이 창안한 용어로, '남의 지시 이전에 스스로 자기 생각·평가에 대해 생각하는 능력'을 말한다. 갈등 관계에서 이 능력이 발휘될 경우 반성, 사과, 화해 등이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고, 메타인지가 전략적 사고와 합쳐 이상적으로 발휘된다면 그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할 수 있다.
(출처: 나무위키)


#1

필자, 당신의 메타인지는 어떠한가요?

나에 대한 메타 인지는 꽤나 높은 편이라고 자부하는 편이다만, 남들이 나를 보는 인지는 그에 비해 꽝 그 자체예요. 그러니 반점을 깎고 시작해도 되나요?


그렇다면 남들이 보이는 나의 모습은 지금 어때 보이는데요?

날 것으로 말씀드린다는 것이 쪽팔리긴 한데 거짓말은 또 싫네요.

그래도 저라는 사람이 나쁘지 않아 보일 것 같아요. 사람의 형태로서 어떻게 생각할지는 제가 온전히 가늠할 수 없지만, 겉적인 이미지는 반복되어 들려오는 단어들로 유추해 볼 수 있겠어요.


일적으로는 프리랜서로서 입지를 꽤 잡아가고 있고,

알아주는 플랫폼에서 제의를 받아 온라인 강의를 개설하고,

본업과 여러 사이드 프로젝트를 지속 이어하고,

그렇게 번 돈으로 최근에 자차도 생기고(물론 소형 SUV이지만)….


아, 이건 명심해 줘요. 공부머리가 썩 좋지 않아요. 근데 이상하게 눈에 보이는 행위만큼은 습득력이 좋아요. 예를 들면 눈으로 보이는 글, 디자인, 몸으로 움직이는 것, 사회성과 친화력이라고 보면 되겠네요. 왜인지 얌체 같아 보이기도 해요. 단점을 아주 잘 숨기고 장점만 드러나는 것만 같아 솔직하게 말하는 걸 자처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면 다재다능해 보이는 면이 있어 보이기도 하거든요.


지금 당신 자랑하려고 날 부른 거예요?

아니 아니요. 잠시만요, 제가 봐도 내뱉은 말들이 콧대 높아 보인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진정해도 괜찮아요. 저는 소인일 뿐이란 걸 누구보다 더 잘 알거든요. 그러함에도 약간의 앞섬이, 저의 자연스러운 다방향적인 행동이 때론 주변인들에게 조급함을 주는 것 같아 제 마음이 쉽지 않다는 걸 아직도 모르시다니 오히려 서운하기도 하네요. 그들의 마음속 시선에 못 견뎌, 못하는 척 모르는 척 숨기고 사니 속이 답답하더라고요. 얼마나 사람들이 제가 바보 같은지 잘 모르는 것 같아 이참에 제대로 고지하고 싶어 글을 빌린 거뿐이에요.


저는요, 여행을 하면서 이용약관 자세히 못 보고 이중예매해서 무려 100만 원 남짓한 돈을 수중에 날려보았고요.

이메일을 잘못 작성하여 비행기 시간표가 바뀐 메일을 확인도 못하고 비행기를 하루 전날 떠나보냈기도 했어요.

아, 최근에는 이런 일도 있었네요. 사이드프로젝트를 구성하였으나 목표금액을 못 채워 대면적인 실패 기록을 모두가 보았어요. 근데 이것은 전혀 쪽팔리지 않았어요! 다시 도전해 보면 되는 일이잖아요.

사실, 무엇보다 최근에 너무나 큰일이 있었어요. 이전에 작업하였던 프로젝트의 문제가 갑작스레 이슈가 생겼어요. 그리고 그것은 아주 작은 실수로 기관 측에 안 좋은 이미지와 더불어 큰돈을 뱉어내야 하는 억울한 일이 되어버렸어요. 모두가 납득이 가능한 미비한 실수였음에도 결과는 너무나 크고 명백한 제 책임이었어요. 저는 인정만큼은 잘해요. 근데요, 솔직히 마음은 아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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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가 겪는 재앙의 시작은 우리의 상상보다 경미하다. 아주 작은 불씨가 거대한 산불을 만들듯, 아주 경미한 실수로 우리의 꼬임은 거대하게 번져간다.


인생을 살아가보면, 각자의 인간군상이 신기할 정도로 다른 변수로 실수를 만들어 내고 번짐을 경험한다. 때론 질병과 같이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찾아오고, 일상과 같이 행동 범위 내 가늠이 가능한 실수가 찾아온다. 인간이란 개체는 단순해서 거대한 번짐은 거대한 실수와 문제 속에서만 일어난다고 생각하지만, 우린 늘 오만하다. 그래서 좌절한다. 생각보다 너무나 작은, 그 경미함이 인간을 너무나 멍청하게 만든다. 그래서 또다시 단순하게 인간은 자신을 자책한다.


양심이 있게도 이 번짐은 인생에 빈번하게 찾아오진 않는다. 아주 가끔 찾아온다. 바로 내가 오만해졌을 때 찾아온다. 자신에게 쏠린 화살이 너무 아픈 인간은 등을 돌리고 자기에게 박혔던 화살을 빼내어 세상을 향해 쏘아댄다.


매번 번짐 현상을 마주할 때면, 마음이 정말로 쉽지 않다. 모든 정신이 그것으로 채우게 하고, 아무것도 집중할 수 없는 환각의 상태로 만든다.



바로 며칠 전, 나도 위에서 언급하였던 업무 속 어려운 상황을 겪으면서 마음이 너무나 쉽지 않았다. 지금도 해결을 하려고 노력은 하고 있지만, 작업한 비용보다 더 많은 돈을 뱉어내야 하는 결과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이와 더불어 무언의 작은 꼬임들이 지속 일궈내며 마음의 지침과 속상함이 치밀어 오르다, 할 일을 해야 하니 마음을 다 잡고 다시 잠재워짐을 반복하고 있다. 현재의 나는 많은 위로함이 필요한 상태가 되어 버렸다.


그러함에도 어린 날과 참 많이 달라졌다. 20대의 끝자락에 이러한 감정을 느껴볼 수 있다니 영광이다. 지금 그냥저냥 잘 살아간다. 해야 할 일은 해야 하니 한다. 그래도 문제에 있어 후회함은 없게 할 수 있는 만큼은 최선을 다해본다. 마음이 답답해지면 자기 전 눈물콧물 흘려 내보내고, 화가 치밀어 오르면 힙합 노래를 크게 틀어 가수가 나 대신 상대를 리듬으로 혼내 줌으로 분노를 뱉어낸다. 그리고 고난을 마주해야 만이 깨우는 새벽예배로 향하여 기도로 회복함을 바라본다.


사고해결방식이 이전과 많이 달라졌음을 느끼며 이 정도면 메타인지의 발전이 있지 않을까 기대감을 품어보았다.


우리를 작게 만드는, 경미함 그리고 미비함 앞에 쪽팔려서 다른 이들에게 말을 못 하여도 마음속으로 울부짖은 기도 속에서는 나의 이전 경험을 떠올리게 하며 격분된 나를 너무나 평온하게 만들어주었다.


아, 지금 회복함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구나.
이 실수를 두 번 다시는 안 할 멍청 비용*을 지불할 기회가 찾아왔구나.

*남들이 보면 멍청할 정도로 돈, 시간, 감정을 쓰게 되며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하는 행위


나의 인생 속 회복함이라는 단어에서, 변치 않고 나오는 이야기는 '쿠바'와 '퇴사'다.

두 감정의 경험과 감정은 내가 말, 그리고 글로 표현한 것보다 더 크게 내 마음에 자리 잡혀있기에 백번 말해도 남들에게 다 전하지 못할 나만이 아는 서사 속 감동이 존재한다.


쿠바여행의 마지막 날, 말레꼰의 노을을 보며 읊었던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곳에서 느낀 감정을 평생 추억하라고 말도 안 되는 고생을 먼저 맛보게 해 주었구나

그 당시 비행기 티켓 이슈부터 입국까지 고생길의 연속이었지만, 그렇기에 그곳을 배회하며 느낀 감정과 환대의 인연은 내 삶의 전반을 뒤흔들 만큼 뇌리에 세게 박혀졌다. 나의 퇴사시절 때도 그랬다. 지금 그때를 생각해도 바로 눈시울이 붉어진다. 정말 죽도록 힘들었는데, 이러한 경험을 했다는 것에 진심 담아 감사하다는 마음으로 덮여 있다.


쿠바에서의 경험도, 너무나 아팠던 마지막 회사에서도, 그저 시간이 흘러가서 내뱉을 수 있는 말은 아니다. 지금도 진심 다해 말할 수 있다. 그 경험이 없었으면, 내가 사랑하는 나도 지금 여기 없을 것이다. 잘못 변형된 못난 내가 있을 생각을 하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멋'인 폼생폼사 자아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더 끔찍하다.


곧 다가올 여행에서는 나를 어떠한 감정으로 회복함을 줄까?

남은 하반기의 일감에서는 어떠한 일감으로 회복함을 경험할 수 있을까?


이 말을 뱉고 나니, 뒤에서 하하하하 크게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 왼쪽의 눈이 오른쪽에 닿을 것만 같이 한껏 흘긴 채 멈추어 크게 소리를 질렀다.

잠시만요,
저 정신승리하는 거 아니에요-
저의 진심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나에게 떠올리게 만들어 주신 따뜻한 메시지였어요.


해결이 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다. 이것은 정말 확실하다.

근데 이것 또한 너무나 확실하다. 회복함은 분명하게 찾아온다. 내가 인지하고 있으면 그것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 그 감정을 코 앞에서 마주해도 나는 그것을 못 본 체 떠나가게 된다. 그 회복함은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우리가 예견하지 못한 것으로 채워준다. 내가 경험했었던 것처럼, 늘 그래왔듯.


글의 마침표를 찍으러 가고 있는 지금,

진심 다해 고백한다. 곧 다가올 회복이 너무나 기대된다고.


모르는 인연이 나를 위로해 줄지,

새로운 상황이 나를 위로해 줄지,

곁에 있던 인연이 나를 위로해 줄지,

곁에 변함없이 있던 상황이 나를 위로해 줄지.


그 위로함을 새롭게 떠나는 여정에서 만나기를 기대해 보며, 그것을 발견하기 위해 온몸의 신경과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미소를 머금으며 그토록 가고 싶었던 변수의 끝판왕 속으로 드디어 떠나간다.



p.s.

수많은 변수 속 돌고 돌아 여행지를 드디어 확정 지었습니다. 인생의 가장 뜨거운 여름이 될 것 같은 20대 마지막의 6월, 새로운 여행기로 곧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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