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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엠 저리킴 Jun 13. 2021

지옥에서 사옥까지 #002

창업 5년 만에 지옥에서 사옥까지, 스릴 넘치는 창업 드라마

#2-1. 2016년 5월 30일


영훈과의 지난 술자리 이후 벌써 3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매년 준비하던 5월의 프로젝트는 성황리에 잘 마무리되었고, 진혁은 함께 일하고 있는 팀원들에게 가장 먼저 새 회사에 대한 의견을 구했다.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함께 일 할 동료들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냥 주먹구구식으로 ‘알아서 잘해줄 테니 나만 믿고 같이 가자’라는 옛날 방식보다는 구체적인 비전과 계획, 복지, 지분 등에 대해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직원들의 입장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지금의 안정적인 회사를 버리고 가야 하는 상황에서 최소한 지금과 동일한 수준의 급여나 복지는 기본이고, 향후의 비전이 명확하고 구체적이어야 할 것이라고 진혁은 생각했다. 리스크에는 리턴이 따라야 하는 게 너무도 당연한 이치이니까, 현재의 회사보다 새로운 회사의 가치와 철학이 더 좋아 보여야 직원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판단했고, 실제 직원들의 반응도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결국 웹툰 <미생> 팀과 마찬가지로 진혁 포함 3명의 멤버로 시작하기로 했다. 당초 한 개 팀 6~7명으로 구성하려 했으나, 현재 몸담고 있는 회사와의 여러 가지 관계를 고려해서 일단 최소 인원만 함께 하기로 했다. 창업 멤버 3명은 함께 구체적인 사업 계획안을 업데이트했고, 드디어 영훈의 회사로 방문하기로 한 날이 다가왔다.


"어, 지금 사무실로 가고 있어. 오늘 미팅에는 너네 회사 직원들도 들어오는 건가?"


"어. 재무 쪽 부장하고 직원 몇 명 같이 들어갈 거야. 빨리 끝내고 술이나 먹자"


지난 3주간 가끔씩 영훈과 통화하며 간단한 계획이나 일정 등은 공유했으나, 정식으로 사업 제안서를 보여준 적은 없었다. 투자는 이미 결정되었고, 오늘의 사업 설명회는 단순한 요식행위에 불과했음에도 처음 해보는 사업 보고여서 인지 묘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영훈의 사무실에 도착한 진혁은 준비해 온 사업 계획서를 열고 브리핑을 시작했다. 진혁은 발표를 하면서 영훈을 포함한 그쪽 직원들의 표정을 꾸준히 살펴보았다. 발표 중간에 몇 가지 질문과 대답이 오갔고, 형식적인 발표 자리가 마감이 되었다. 직원들의 표정은 시종일관 무표정이었다. 대표의 친구에게 보일 수 있는 의례적인 미소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공간을 가득 채운 서늘한 공기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오늘 아무래도 술 마시기 어렵겠다. 갑자기 공장에 일이 좀 생겨서... 미안"


"괜찮아. 뭐 오늘만 날인가? ㅋㅋ 빨리 날 잡아서 우리 직원들하고 같이 킥오프나 제대로 하자."


"어... 어... 그래... 그러자. 그럼 되지."


영훈의 목소리 톤이 미세하게 달라지고 있었음을 진혁은 어렴풋이 눈치를 채고 있었으나, 그저 기분 탓이려니 하고 그냥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그 후로 일주일이 지나도록 영훈으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진혁은 그날 회의실을 가득 채운 서늘한 공기와 영훈의 주저하는 목소리를 통해 이미 결과를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현실로 다가오는 것이 두려워 먼저 연락을 하는 것을 며칠 째 망설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진 상태이고, 되돌아갈 다리까지 모두 끊어져 버린 상황인 진혁은  두렵다고 마냥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맞을 매라면 하루라도 빨리 맞자는 심정으로 일주일 만에 영훈에게 먼저 연락을 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연락이 없냐? 뭔 일 있냐?"


"어... 뭔 일이 있는 건 아니고, 좀 사정이 있었어. 준비는 잘 되고 있어?"


"이제 시작인데 뭘. 할 일이 태산이지. 그나저나 혹시 너 투자 계획에 차질 생긴 거냐? 혹시 그런 거면 빨리 말해줘. 그래야 나도 대안을 마련하든지 할 거 아니야."


진혁은 그간의 마음 졸였던 감정은 숨긴 채 짐짓 대수롭지 않은 척 먼저 질문을 던졌고, 그 대답이 돌아오는 데까지 걸린 그 1~2초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숨이 막혔다.


"어... 사실은 좀 그렇게 됐어. 자금 사정도 빠듯하고, 준비하는 일이 몇 개 빠그라져서..."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라는 유명한 노랫말처럼 진혁의 슬픈 예감은 이제 정말 현실로 되돌아왔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었으므로 미련을 가질 시간이 없었다. 


"오케이 알았어. 빨리 말해줬으면 좋았을 걸. 일단 내가 알아서 해볼게. 너는 신경 쓰지 말고, 니 회사 일 잘 챙겨라. 나한테 또 돈 빌리러 오지 말고 ㅋㅋㅋ. 나중에 또 필요하면 연락할게."


"미안하게 됐다. 괜히 내가 바람만 집어넣고. 꽁무니를 빼는 상황이 돼서…"


"미안하긴... 원래 투자라는 게 다 그런 거지 뭐. 또 기회가 있겠지."




#2-2. 2016년 6월 7일


진혁은 무작정 제주도 행 비행기에 올랐다. 혼밥은 물론 혼술이나 혼영도 극도로 싫어하는 그가 혼자서 여행을 떠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결심이었다. 차분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면서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들과 복잡한 머릿속을 하나씩 정리하고 돌아갈 계획이었고, 일부러 숙소도, 렌터카도 예약하지 않았다. 공항에 내린 그는 그때부터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기왕 걷는 거 코스는 경치 좋은 해안도로로 잡았다. 공항 서쪽 편 도로를 따라 올레길 17코스로 계속해서 걸었다. 머릿속을 정리하려 간 여행이지만 걸으면 걸을수록 정리는커녕 오히려 실타래는 더 꼬여만 갔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이호테우 해변에 도착했다. 6월의 햇살은 몹시 뜨거웠고, 잠시 뜨거운 햇빛을 피하기 위해 정자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 꽤 오랜 시간을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웬일인지 그 아름다운 경치가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이호테우 해변 쉼터


다시 툭툭 털고 해변 도로를 따라 걷기 시작한 진혁은 외도 포구, 연대 포구, 하귀 포구를 지나 가문동 포구 인근 카페에 자리를 잡고, 에스프레소 한 잔을 주문했다. 휴대폰으로 확인해보니 총 5시간에 걸쳐 14km를 걸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래 걸어서였을까? 아니면 생각이 많아서였을까? 진혁은 오늘따라 에스프레소가 유난히 쓰다고 느꼈다. 하지만 쓴 맛으로 입안이 온통 채워질 때쯤 뒤늦게 따라오는 달달한 맛, 진혁은 에스프레소가 마치 자신의 인생과 닮아 있다고 생각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가문동 포구 인근 노천카페에서 에스프레소


"이봐, 자신 있어?"


진혁은 창업을 처음 결심했던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스스로에게 수십 번 수백 번 물었던 질문이다. 과연 정말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물론이지."


그때마다 돌아오는 답변은 동일했다.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공부에 취미도 없고, 크게 노력을 하지 않았음에도 진혁의 삶에는 항상 샛복*이 따라주었다. 예를 들면, 암기 위주의 학력고사였다면 인 서울 대학은 꿈도 꾸지 못했을 텐데, 진혁이 고1이 되자 시험 제도가 학력고사에서 수능시험으로 바뀌며 성적이 갑자기 상위권으로 도약하더니 결국 홍대에 합격하는 쾌거를 이루었다던지 하는 식의 일이다. (*샛복 = 복과 복 사이에 낀 작은 복)


처음 영훈이 아니었다면 시작도 안 했을 창업의 길이었지만, 결국 영훈은 이 드라마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홀연히 퇴장하였다. 이제 남은 짐은 오롯이 진혁의 몫이었다.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시간이 지나 봐야 알 일이지만 이것이 그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면 분명 그 이유가 있을 것이라 진혁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누군가의 투자가 당장에는 좋고, 쉽고, 편할 수는 있지만 결국 투자자의 의중대로 끌려가다 보면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올 게 분명하다. 당장에는 조금 부족하고, 힘들고, 어렵겠지만 내 자금으로 시작해서 내가 해보고 싶었던, 그리고 직원들에게 분명한 약속을 맘껏 해줄 수 있으니 오히려 더 좋은 기회가 아니겠는가’


진혁은 이 전에 사업다운 사업을 해본 적은 없었다. 한 때 잠시 조그만 만화방을 해본 경험이 전부인 초보 창업가인 진혁은 처음부터 너무 가혹한 신고식을 치르게 되었지만 특유의 긍정법으로 이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지금의 이 시련이 나중에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일단은 주어진 조건에 최선을 다해서 후회 없이 해보고 장렬히 산화되는 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제주도에서의 2박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진혁은 이제 본격적인 창업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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