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生촉死 - 촉에 살고, 촉에 죽고
촉이 좋다는 말은 음... 뭐랄까, 눈치가 빠르다 이런 것 하고는 결이 좀 다르다. 또 신기(神氣/신끼)가 있다 이런 말 하고도 살짝 뉘앙스가 다르다. 그냥 말 그대로 촉이 좋다. 딱히 이런 표현 말고는 방법이 없어 보인다. 혹시나 싶어 구글 번역기에 돌려봐도 "촉이 좋다 = feel good"이다. 오늘은 이 '촉'에 관한 몇 가지 개인적인 에피소드를 털어볼까 한다.
내 부모님은 성격이 극과 극인데, 희한하게 잘 싸우지를 않는다. 저 정도로 다르면 수십 번 싸우고도 남았을 텐데, 살면서 말싸움을 본 게 한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이다. 육체적인 싸움이 있었던 건 단 한번! 내 촉이 빛을 발했던 바로 그날이었다.
재수생이던 당시 카페에서 매일 알바를 하고 있었다. 대부분 12시에 알바를 마치면 친구들과 어울려 오락실도 가고(무려 PC방이 없던 시절), 술집도 가고, 노래방도 가고 하는 나날이 무한 반복되고 있었다. 하루는 정말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9시 반쯤에 몸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고 카페에서 조퇴를 했다. 자주 있었던 일이 아니고 하필 정말 딱 그날뿐이었다.
평소 술을 참 좋아하시는 어머니는 항상 새벽일을 마치고, 일찌감치 친구들과 술 한잔을 즐기다 아버지 퇴근하실 시간에 맞춰서 집에 돌아오시곤 했다. 술을 전혀 입에 대지 않는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잘 이해를 못했지만, 그래도 퇴근 시간에는 맞춰서 오니 별 트러블이 없었다. 그런데 하필 내가 첫 조퇴를 하던 그날 어머니는 술을 과하게 드시고 연락도 없이 인사불성이 되어 내가 집에 돌아온 10시를 넘어 들어오셨다. 1994년 당시는 휴대폰은커녕 삐삐도 잘 없던 시절이라 사전에 연락을 주고받은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어머니에게 큰 소리를 쳤지만 술 취한 사람에게 두려움 따위는 없는 법. 실실 웃으면서 아버지를 자극했다. 분노를 참지 못한 아버지는 급기야 어머니에게 폭력을 쓰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나는 빠르게 아버지를 제압했다. 아버지보다 20cm 이상 큰 내가 뒤에서 아버지를 팔로 안고 꼼짝 못 하게 만드는 일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였다. (한편으로는 나한테 붙잡혀 정말 꼼짝도 못 하는 아버지가 순간 측은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구석에서 숨어서 쫄아 있던 나의 누나는 상황이 정리되고서야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누나만 혼자 있던 집에 두 분의 싸움이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면 지금도 소름이 돋는다. 그날 왜 나는 하필 이유도 없이 조퇴를 했을까? 왜 하필 어머니는 그날 그렇게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신 것일까? 왜 하필 그날에 평생 안 싸우던 두 분의 싸움이 일어났을까? 그 후로 30년 가까이 지났지만 두 분은 여전히 크게 싸운 일이 없다. 정말 아직도 미스터리한 일이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이상한 나만의 버릇이 있다. 내가 술을 마셨건 안 마셨건 취객이 내 쪽으로 걸어올 때는 무조건 최대한 멀찌감치 떨어져서 피한다. 그전에 취객과 시비가 붙었던 적이 한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거의 99%의 확률로 취객은 피하고 보는 게 나의 루틴이었다. 그냥 느낌적인 느낌으로 저 취객이 나한테 행패를 부릴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이다.
물론 그 덕인지 어쩐지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취객과 시비를 붙을 일이 없었다. 절대로 취객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간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과 술 한잔을 걸치고 다 같이 골목길을 걷고 있는데 정면에서 또 취객이 우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평소와 달리 오른쪽으로 세 걸음 정도 옮겨갈까 했지만 친구들도 있고, 한 번쯤 안 피했다고 별일 있겠나 싶은 마음에 그냥 스치듯 지나가기로 했다.
슬픈 예감은 왜 틀린 적이 없나... 그 취객은 무슨 자객 인양 내 옆을 지나는 순간 갑작스럽게 팔을 쭉 뻗어 내 목을 강타했다. 마치 프로레슬링 넥 슬라이스를 연상케 하는 그런 포즈로 급습을 한 것이다. 모두 취해있던 내 친구들은 갑자기 그 취객을 때리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나는 덜 취하기도 했어서 술 취한 그 친구들을 말리느라 안간힘을 썼고, 간신히 취객을 그들로부터 구해낼 수 있었다. (한 시간 후에 친구 녀석들은 술을 마시다 말고, 옷에 왜 피가 묻어있냐며 궁금해했다.. 미친 것들...)
회사를 5년째 운영하면서 참 신기한 일들이 있다. 부장이던 시절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대표의 자리가 되자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직원이 20명이 넘어서자 직원들과의 개별적인 토크의 시간을 갖기가 어려워졌다. (슬퍼 ㅠㅠ) 대신 오다가다 직원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는 습관이 생겼다. 팀과 팀원들의 일정을 대략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일정과 얼굴을 매칭 해보는 것이다.
그러다 묘하게 웃고 있지만 웃고 있지 않은 얼굴이 눈에 걸린다. 모른 척 해보려 노려하지만 자꾸 머릿속에서 그 얼굴이 떠오른다. 그런 경우 직원의 상황으로 빙의해 보는 습관이 발동된다. 100%는 아니겠지만 최대한 입장을 이해해보려고 시뮬레이션을 한다. 그리고 항상 아내에게 검증을 받는다. 내 상상력이 합당했는지 아닌지, 혼자 오버하는 것은 아닌지를 확인 후에 실행에 옮긴다.
그렇게 어느 정도 문제점이 있다고 판단되면,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있는지 또 고민해본다. 혹여 그 문제에 답을 찾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우선 전화 혹은 면담을 요청한다.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다 쓰윽~ 쓰윽~ 우회하여 그 문제에 대해 조금씩 접근한다. 처음엔 주저하지만 집요한 유도신문에 대부분 속내를 털어놓는다.
만약 내가 생각했던 그 문제가 진짜 없다면 없는 대로 다행이고, 그 문제가 존재했다면 해결책을 제시하던지 아니면 문제 자체를 인지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어 좋다. 하지 않았다면 계속 마음에 걸렸겠지만 일단 하고 나면 그래도 마음이 좀 안심이 된다. 걱정 걱정 김걱정인 관계로 그 걱정거리를 안고 있으면 마음의 병이 난다.
이런 것도 촉의 일종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거의 대부분 내가 걱정했던 부분이 맞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한 속앓이가 곪아서 밖으로 분출되기 전에 미리 진단하고, 초기에 치료하면 확실히 효과가 빠른 법이다. 때로는 직접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때로는 문제에 대한 인지와 직원에 대한 존중(respect)의 말로, 때로는 약간의 뇌물(기프티콘)이나 소소한 혜택으로...
이 밖에도 상당히 소소한 '촉'의 스토리가 많은데, 그때 당시에는 소름이 돋았다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금방 잊어버리는 성격 탓에 많은 에피소드를 나열하지는 못했다. 대학교 추가합격자 전화를 받던 날 (역시나 휴대폰이 없던 시기라 집 전화 앞에 대기했었어야 했다), 처음 친구의 투자가 철회되던 그 통화를 하던 날, 사업의 대전환이 된 그날의 전화 한 통화를 받던 날 등 어느 날 갑자기 예고도 없이 어떤 느낌이 전두엽을 통과하며 나에게 강력한 시그널을 준다. '아! 왠지 모르겠지만, 딱히 정확한 이유는 없지만 이건 이럴 것 같아!' 하는 머리를 스치는 경우에는 거의 예외 없이 그 일이 끝내 벌어진다. 그것을 논리적으로 과학적으로 설명하라고 하면 절대 할 수가 없다.
그 이상한 기운의 '촉'과 상대방에 대한 투머치 '관심', 그 문제를 그냥 지나치거나 피하려고 하지 않고 꼭 부딪혀서 해결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열심과 '진심'이 결합되어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 '관심'과 '열심'과 '진심'을 부정하는 지인이 이 글을 본다면 미리 사과의 말씀을 드리는 바이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