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만 존재하는 빠른 생일의 비밀
내가 바로 그 빠른 생일이다. 아마 전국 모든 빠른 생일들 중에서도 가장 빠른 사람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 내 생일은 무려 1월 1일이다. 혹여 부모님이 출생 신고를 늦게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되어 조심스레 여쭤봤지만 리얼 1월 1월이라고 하신다. 음력으로 12월 1일. 그래서 나는 용띠가 아니고 토끼띠이다. 그 와중에 내 어릴 적부터 친했던 친구의 생일은 12월 31일이었다. 우리는 12월 31일 저녁에 모여서 생일 파티를 하고 다시 몇 시간 후 1월 1일 새해가 밝으면 다시 촛불에 불을 붙이는 행위를 했다. 그때는 주민등록 상으로 한 살이 어려서 속상했지만 지금 나이가 들고 보니 '개이득'이다.
우리나라에만 존재한다는 이 '빠른 생일'은 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쓸데없는 분석을 해보았다. 물론 학제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고리타분한 얘기는 제외하고 실질적인 이유를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한국 나이'와 '만 나이'는 애초 개념 자체가 완전히 달라서 둘 사이의 갭은 매우 유동적이다. 어떨 때는 1살 차이였다가, 어떨 때는 2살 차이가 나기도 한다. '한국 나이'에 의하면 12월 31일에 태어난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하루가 지나면 2살이 되는 촌극이 펼쳐지지만, '만 나이' 기준으로는 1년이 지나야 비로소 1살의 지위를 얻을 수 있는 차이가 있다. 물론 모든 서류나 법령은 대부분 국제적인 룰에 의해 '만 나이'로 하긴 하지만 실생활에서는 여전히 '한국 나이'로 계산하는 게 일반적이다.
유독 한국에서만 존재한다는 '빠른 생일'은 사실 (거의) 한국에만 존재한다는 또 하나의 문화적 특징인 '호칭' 문화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호칭 문제를 정리하기 위해서 반드시 그룹을 구분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하필 2월 28일생까지 한 학년에 포함되는 학제로 인해 완전히 꼬여버린 것이다. '동기'라는 그룹을 결성하는 데는 태어난 '연도'보다는 학교를 같이 다닌 '학년'에 더 연대감이 생기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나라에 이런 '형, 누나, 오빠, 언니, 동생'하는 호칭이 없었다면 굳이 빠른 생일이 이렇게까지 이슈화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냥 몇 월에 학교에 갔건, 현재 몇 학년이건 관계없이 누구를 만나도 그냥 외국처럼 심플하게 "hi, John"하면 되는 일이다. 외국에도 이런 '형'이나 '동생'의 개념이 존재하긴 하지만 현실에서 부를 때는 그냥 호칭 없이 이름을 부른다. 심지어 회사에서도 직급을 부르지 않는다. 상무님한테도 "Hi, Michael", 대표님한테도 "Hi, Jane"이 전부이다.
결국 이 호칭 때문에 모든 '빠른 생일' 논쟁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칭을 해야 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나보다 형인지, 동생인지를 반드시 확인하고 정할 필요가 있었다. 같은 연도에 태어났다 할지라도 학교를 먼저(=빨리) 들어간 사람들은 중간에서 애매한 포지셔닝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흔히 "너 때문에 족보가 다 꼬였잖아"라는 말을 매일 들을 정도로 억울한 가해자 취급을 받는 게 일상이 되었다. "내 잘 못이 아니라고! 내가 빠르게 태어나고 싶지도 않았고! 내가 2월 28일까지 학교를 가게 만든 장본인도 아니라고!"
물론 2003년부터는 1월 1일 ~ 12월 31일까지를 한 학년으로 묶어서 입학하는 제도로 바뀌었기 때문에 더 이상 '빠른 생일'에 대한 논란은 없을 테지만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이 '빠른 생일' 논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빠른 76년생인 내가 어설프게 그냥 76년생과 친구를 먹어 버리는 바람에 내 학교 친구들인 75년생들과 76년생이 친구가 되는 불편한 상황이 벌어지고, 빠른 77년생과 친구인 그냥 76년생까지 가세한다면 족보는 대혼돈의 세계로 돌입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논리로 확장을 해보면 1살부터 99살까지 모두가 친구가 되는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다. 나는 빠른 생일의 선두 주자로서 이러한 상황을 빠르게 해결하고자 특단의 조치를 내려 모든 지인들한테 아래와 같은 <호칭 정리표>를 뿌렸다.
이 일은 가상의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실제로 나한테 일어났었던 일이다. 자주 어울려 다니던 친구들 중 그냥 75년생, 빠른 76년생, 그냥 76년생, 빠른 77년생이 모임을 자주 가졌었는데 초반에 호칭이 애매하다 보니 어영부영 서로 호칭을 피하는 일이 벌어졌다. 심지어 이 네 사람 모두 공교롭게도 95학번이어서 더 사태는 미궁 속으로 빠질 뻔했다. 그런 애매한 상황을 정리하고자 내가 표를 만들어서 공유했다. 친구의 친구라고 반드시 친구를 먹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한자리에 앉아서도 나의 친구 장문O(그냥 76)은 또 다른 나의 친구 박선O(그냥 75)에게 형이라고 부른다. 전체의 관계를 생각하지 말고, 개인과 개인의 관계만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니까 모호한 관계가 사라지고, 꼬였던 족보가 한 번에 풀렸다.
이제 새로운 정부에서 '한국 나이'를 없애고, 글로벌에 맞는 '만 나이'를 표준으로 삼겠다고 한다. 이미 우리나라의 어떤 기관도 '한국 나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곳은 없다. 단지 사람들이 여기에 익숙하기 때문에 관습적으로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마치 한 때 '설날'을 없애고, '1월 1일 신정'으로 통합해도 결국 사람들이 우리에게 익숙한 '설날'을 고수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런 쓸데없는 일에 매달리지 말고, 산불로 힘들어하는 강원도 이재민들이나, 코로나 방역 지원금이나 어서 약속대로 지원했으면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