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파이널 테이블
202X년 가을, 올해 최고의 포커 챔피언을 가리는 서울컵 세계 포커 인비테이션(SGPI)이 열리고 있는 강남의 인터컨티넨탈 호텔 그랜드 볼룸에서는 최종 우승자를 가리기 위한 9명의 선수들이 파이널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다.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파이널 테이블에 올라온 9명의 선수 중에는 한국 대표 선수가 무려 3명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오랜만이네.. 다들 잘 지내고 있었지?"
"그.. 그래. 진짜 오랜만이다. 그치? 이게 얼마만이야.."
"오늘 정말 멋진 승부 기대할게. 친구라고 절대 봐주는 거 없다. 알지?"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파이널에 진출한 세 친구 영훈, 진혁, 민섭은 지나간 날들을 회상하며 희미한 미소와 함께 서로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 미소의 의미가 무엇인지 서로 정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이 대회가 끝나면 결과와 관계없이 오랜만에 소주 한잔 하며 지난 시간을 훌훌 털어 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셋은 늘 함께였다. 가족보다 더 오랜 시간 같이 만났을 정도로 셋의 우정은 각별했다. 하지만 홀덤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난 후 사소한 오해들로 인해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들이 교차하며 셋은 결국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어쩌다 게임 테이블에서 만나는 경우가 있어도 그때마다 가벼운 눈인사 정도로 서로 지나치곤 했다. 홀덤의 세계는 세상 그 어떤 승부보다 냉정하고 냉혹하다. 그런 비정한 세계에서 친구들과 함께 한다면 많이 든든했을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나간 시간을 되돌리기엔 그들은 너무 먼 곳까지 와버렸다.
그렇게 서로를 애써 모른 척하며 게임에만 집중하며 살아왔는데 공교롭게도 하필 운명의 날, 운명의 장소에서 셋은 극적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파이널 테이블에는 세계 최정상급 포커 스타들 6명이 함께 있었지만 셋은 아랑곳없이 오직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였다. 그렇게 운명의 파이널 테이블 첫 번째 딜이 시작되었다.
1994년 여름
"진혁아 우리 집에 피자 있어. 얼른 먹으러 와"
"오! 진짜? 웬일이야? 나 갈래 갈래. 먹지 말고 내 거 남겨놔"
"알았으니까 빨리 오기나 해. 올 때 담배 하나만 사와라"
"담배? 나 돈 없는데.. 담배는 좀 미리미리 사다 놓지 맨날 담배도 안 피우는 나한테 시키냐.."
"이따 돈 줄 테니까 빨리 사서 뛰어와. 안 그러면 이 새끼들이 다 먹을 거야."
"아.. 알았어 빨리 갈게. 기다려"
진혁은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는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수중에는 딱 천원짜리 두장이 있었는데 영훈이 즐겨 피던 <THIS>를 사고 나니 딱 1,100원이 남았다. 진혁은 친구들에게 피자를 뺏기지 않기 위해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영훈의 집으로 향했다. 영훈의 집을 가기 위해서는 약간의 언덕을 넘어가야 했지만 진혁은 육중한 몸을 이끌고 부지런히 뛰었다.
"야 이 새끼 진짜 담배 사 왔네. 거봐 내가 올 거라고 했지? 하하하"
"그러게 너는 매번 속으면서 또 속냐? 크크크크크크크"
"속긴 뭘 속아. 다 알면서도 그냥 너네 보려고 온 거지. 미친놈들 내가 니네를 믿을 거 같아?"
진혁은 또 속았다는 것을 알고 매우 화가 났지만, 친구들 앞에서 속았다는 것이 쪽팔려서 화를 내기보다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사실 영훈은 자주 이런 식으로 진혁을 집으로 불러내곤 했다. 진혁네와는 달리 영훈의 집은 중산층 이상이었고 실제로 가끔씩은 피자와 같은 간식거리들이 있었기에 진혁은 속는 셈 치고 영훈의 집으로 향한 것이다. 진혁은 열에 아홉이 거짓이라 해도 한 번 있을 수 있는 피자의 유혹을 피할 수 없었다. 그날은 하필 그 아홉에 속하는 날로 진혁은 헛걸음을 하긴 했지만 많은 친구들 앞에서 티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야야 그만 떠들고 빨리 판 깔아"
"뭐야 숨도 안 돌리고 바로 시작한다고?"
"이거 할라고 빨리 뛰어 온 거지. 내가 뭐 피자 먹을라고 뛰어 온 줄 알아? 시끄럽고 빨리 출발!!"
진혁은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빠르게 판을 깔았다. 영훈과 진혁, 민섭 그리고 개태, 익동, 언생이까지 별명도 요상한 친구들 6명은 모두 분주하게 움직였다. 모두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거나, 알바를 하거나, 재수를 하거나, 백수로 지내는 등 각자의 생활을 하다 지방에 내려갔던 영훈의 방학을 맞이하여 날이면 날마다 영훈의 집에 틀어 박혀 살고 있었다. 그렇게 각자 없는 용돈을 쪼개고 쪼개서 하루가 멀다 하고 도박판이 벌어졌다. 물론 판돈이라고 해봐야 고작 1인당 5,000원~10,000원 내외였지만 목숨보다 귀한 전재산이었기에 그 어떤 도박장보다 비장한 기운이 감돌았다.
종목은 그때그때 달랐으나 주로 세븐 오디를 했다. 바둑이, 하이로우, 도리 짓고 땡 등의 다른 종목도 가끔씩 하긴 하는데 꼭 한두 명씩 룰을 모르는 친구들이 있어서 그냥 무난하게 세븐 오디로 정착한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게임은 2시간 만에 6명 중 3명이 오링(all-in) 되면서 싱겁게 끝났다.
*영훈 : +4,000원
*진혁 : +8,000원
*민섭 : +2,000원
*개태 : -7,000원
*익동 : -5,000원
*언생이 : -4,000원
"야이씨 아무리 도박판에 거울 보고 혼자 쳐도 돈이 빈다는 속설이 있다지만 돈이 2천원이나 안 맞잖아."
"어떤 쳐 죽일 놈이 따고도 매번 숨기는 거야. 진혁이 너 아냐?"
"이런 미친 개태가 뭐래는 거야. 왜 돈 딴 사람한테만 지랄이냐. 잃은 놈이 구라 깔 수도 있는 거잖아. 너 처음에 7천원 아니고 5천원 꺼내놓은 거 아냐? 조심해라 손목 날아간다."
"아니 허구 헌 날 니네 셋만 돈을 따냐. 혹시 셋이 짜고 치는 거 아냐?"
"정신 나간 소리 하고 있네. 이까짓 몇 천원 따려고 양심까지 파는 사람은 아냐."
게임이 끝나고 정산의 시간이 되면 으레 살벌한 대화들이 오고 가지만 아무도 크게 타격을 받는 사람은 없었다. 진혁은 오늘도 8천원이라는 돈을 챙기게 되었다. 사실 가지고 있던 2천원에 만원을 따서 총 12,000원이 되었는데 처음에 4천원이 있었다고 말을 하면서 8천원을 딴 것으로 둘러댄 것이다. 2천원이 있다고 하면 판에 끼워주지 않을까 싶어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
오늘은 영훈의 복귀 후 첫 게임이라 그나마 다들 돈이 넉넉한 편이었기에 진혁은 목숨을 걸고 게임에 임했고 탑 위너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어진 술자리에서 영훈은 (공식적으로) 딴 돈의 절반인 4천원을 술값으로 냈고, 집으로 돌아올 때 진혁의 주머니엔 8천원의 돈이 남아 있었다. 2천원을 들고 집을 나선 진혁은 하루 종일 재밌게 놀고서도 오히려 6천원의 돈이 늘어났다. 워낙 형편이 어려운 진혁의 입장에서는 피자를 먹지 못한 아쉬움을 충분히 채우고도 남은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