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No Korean, Only English
민섭의 승리를 기점으로 세 친구는 조금씩 홀덤 판에 적응해 갔다. 총 9명의 플레이어가 있었지만 영훈 일행을 제외한 나머지 6명은 꾸준히 리바인(Re-buy-in)을 하거나 멤버가 바뀌었다. 3명은 각각 100달러로 시작했으나 어느새 2.5배에서 5배까지 시드가 엄청나게 높아졌다. 특히 그중에서도 민섭의 두각이 두드러졌다. 늘 친구들과의 게임에서 기를 펴지 못했던 민섭이 머나먼 타국에서, 그것도 난생처음 해보는 홀덤 종목에서 이렇게까지 잘하게 될 줄은 몰랐었다.
민섭은 블랙잭에서 진혁이 했던 말들을 되새기며 절대로 무리한 승부를 보지 않으려고 최대한 안전한 플레이를 했으나 정말 운이 좋겠도 낮은 페어로 끝까지 가서 블러핑을 잡아 내는가 하면, 좋은 카드가 왔을 때 다른 사람이 열심히 판을 키워서 자신에게 헌납하는 등 이래저래 좋은 기세를 발휘하며 게임에 임하고 있었다.
게임이 거의 막바지로 가고 있었고, 모두들 큰 대결 없이 게임을 마무리하던 중...
민섭과 진혁에게 각각 10♣︎, 10♦︎과 8♥︎, Q♣︎의 핸드가 들어왔다. 진혁은 적당히 괜찮은 카드였고, 민섭에게는 막판 분위기를 쭉 끌고 갈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민섭이 거칠게 베팅을 하자 대부분 고개를 저으며 폴드를 했고 관광객 K와 진혁이 콜을 받았다. 그리고 운명의 플랍이 펼쳐졌다.
진혁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한방 풀하우스가 메이드 되었기 때문이다. 혹시 누군가 Q 탑페어가 맞았거나, 8을 한 장 들고 있거나, ♠︎를 두 장 들고 있다면 베팅을 치고 나올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일단 침착하게 첵을 외쳤다. 그러자 10, 8 투페어가 된 민섭은 3-bet으로 이어갔고, K는 고민 끝에 콜을 받았다. 진혁은 승리를 확신했다. 그렇게 승부는 기울었다고 확신을 한 채로 턴 카드를 기다렸다.
이번엔 반대로 민섭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10 풀하우스가 완성되었다. 투페어에서 풀하우스가 되는 일은 극히 드물기 때문에 10 풀하우스는 그야말로 기적에 가까운 카드였다. 얼리 포지션인 진혁이 먼저 베팅을 했다. 그러자 고민도 없이 민섭이 3-bet을 했고, K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콜을 받았다.
민섭의 3-bet도 놀라웠지만 K의 콜도 놀라웠다. 방금 턴카드에서 확신의 3-bet이 나온 걸 봐서는 진혁은 민섭이 플러쉬 메이드에 A♠︎를 가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자신의 카드를 이길 수 있는 카드는 10 두장 혹은 Q 두장인데 그럴 확률은 매우 낮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혁은 민섭이 죽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4-bet 올인을 외쳤다.
"(작은 목소리로) 나 하이 카드야 웬만하면 죽어"
이때 딜러가 진혁에게 경고를 했다.
"Hey, Jean. No korean, only English"
"Ok, sorry sorry my mistake"
진혁의 말을 들은 민섭은 심각한 고민의 바다에 빠졌다. 진혁이 민섭의 카드를 이길 수 있는 8 두장 혹은 Q 두장뿐이었다. 아! 혹은 스티플? 그렇다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만약 9♠︎ J♠︎를 가지고 있다면 스티플도 가능한 상황이었다. 진혁의 스타일상 노 메이드로 블러핑을 할 성격은 아니었다. 올인을 해서 만에 하나 지게 된다면 현재 가지고 있는 500달러 이상을 모두 잃게 되는 상황이었다. 현재까지 들어간 돈이 이미 절반에 가깝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Min, 10 second countdown! 10, 9, 8..."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머릿속은 하얘졌다. 진혁의 싸인을 그냥 인정하고 죽어야 하나, 아니면 미친 척하고 들어가서 승부를 봐야 하나..
"4, 3, 2.."
"아, 폴드 폴드"
민섭은 고민 끝에 폴드를 선택했다. 진혁의 힌트가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기 때문이다. 플랍 3장이 깔린 순간부터 진혁은 뭔가 자신이 있는 표정과 몸짓이 풍기긴 했다. 자신의 착각일 수는 있지만 거기에 진혁의 진심 어린 목소리가 더해져 결국 폴드를 선택하고야 말았다.
"Call"
마지막 플레이어 K는 남은 돈이 얼마 없어 고민도 없이 그냥 콜을 받았고 패를 던져 오픈했다. A♠︎ 4♠︎로 A플러쉬였다. 이제 남은 건 진혁의 차례. 진혁은 손에 들고 있던 핸드를 천천히 오픈했다. 8♥︎ Q♣︎ 결국 진혁의 카드는 한방 8 풀하우스였던 것이다. 그 카드를 본 많은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축하해 줬지만, 민섭의 얼굴은 붉어지다 못해 검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한국인 3명이 일행이라는 사실을 최대한 숨겨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만 속은 까맣게 썩어갔다.
Show down 상태에서 결국 리버 카드가 오픈됐지만 3♣︎가 나오면서 이변 없이 진혁의 승리가 확정되었다. 민섭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 진혁을 지켜보았다. 진혁의 마지막 말이 귓가를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맴돌았다. "나 하이카드야 웬만하면 죽어.." 이 말만 아니었어도 고민도 없이 콜을 하는 상황이었는데 정말 어이없는 결정을 하고 만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다른 사람이 아닌 진혁이 먹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인데, 민섭은 진혁의 그 발언이 과연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서 한 말인지, 아니면 고도의 심리전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게 판이 끝이 났고, 영업장은 마감을 했다. 진혁은 그날 100달러로 시작해 거의 800달러까지 올라갔다. 민섭은 그래도 350달러로 250달러의 수익을 거뒀고, 영훈도 100달러를 2배로 만들며 마감을 했다. 끝난 시간이 새벽 1시임에도 불구하고 셋은 축배를 들러 가기로 했고, 진혁은 조금 비싼 술집으로 친구들을 데리고 갔다.
새벽 늦은 시간까지 술자리는 이어졌지만 민섭은 좀처럼 기분을 올릴 수가 없었다. 더구나 진혁에게 그 의중을 물어볼 수는 더더욱 없었다. 새벽은 밝아오고, 민섭은 혼자 생각을 정리하며 술을 홀짝홀짝 마시다 보니 어느새 인사불성이 되어 두 친구에게 끌려 숙소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