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함이 필요한 요즘.

('무직의 삶'에서 필수품)

by 장원장

바야흐로 4년 전

퇴사를 하는 순간

비어진 책상을 보며 홀가분한 순간도 여러 번.

그래도 버리지 않고 챙겨서 집으로 돌아와 나의 책상에 올려둔 것은

바로 '명함' 케이스였다.


처음에는

혹시 필요한 순간이 오지 않을까 싶어서였는데

늘 지갑에 하나씩 가지고 다녔던걸 보니

나도 내 직업이 꽤나 마음에 들었나 보다


남들에게 설명하기 좋은 직업을 여러 개 가져본 사람으로서

이 명함들의 위력을 잘 알기에

유효기간이 끝나버린 명함이라 할지라도

마냥 버릴 수가 없다


남편이 유럽 주재원으로 파견온 날

나도 일반인으로

또, 가정주부로 처음 엄마들 세계에 입성했다.


나는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학교 앞 만난 엄마들과

명함 없이 만나는 첫 대면자리에서

어떻게 나를 소개하고 소개받는지 까먹은 듯했다.

(사실 명함을 나눠주는 그림이 더 이상하긴 하다.)


예전의 나는

대체로 명함을 주고받고

아이스브레이킹 끝나면 본격적인 대화가 들어가는데


지금의 나는

어디서부터가 인사이고

어디서부터 본론인지 모르겠다.

낯선 세상 낯선 사람들과의 소통 속에서

나를 제대로 설명할 단어 하나 찾는 것도 어렵다는 사실을

나는 그곳에서 깨달았다.


그렇게

무채색의 사람이 되어 돌아와

한동안 생각했다.


누군가의 아내, 엄마가 아닌,

회사의 직함을 내밀던 내가 아닌,

자연인으로서 나를 설명할 단어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렇게 시작된

나에 대한 공부는

시간이 갈수록 더 어지러웠고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책을 쓰자'


모두가 나를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이들을 찾고

그들에게 나를 알리려면

나의 생각을 정리해 둘 필요가 있겠다.


그렇게 시작한 글쓰기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나의 블로그를 가득 채웠고

누군가가 보지 않길 바랐기 때문에

비공개였던 나의 이야기들은


지금은 브런치에 하나씩 꺼내놓고 있다.


작가라는 타이틀이

책이라는 예술품을


언제쯤 갖게 될지

어쩜 갖지 못하게 될 신기루라 할지라도


나도 언젠가 그 세계의 입장권을 들고

수줍게 한발 내딛는 날이 오길 바라본다.


이것이 무직의 삶 속에서

브런치 합격이라는 메일을 받고

새롭게 꿈을 꾸기 시작한 나의 'epiphany' 다.


이로써,

이제 새로운 명함을 만들 차례가

다시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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