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역시에서 나고 자라 서울에서 오래 살았지만 부모의 문화유산은 충청도였던 나 역시 팔 할은 충청도였다.
어디 가서 나쁜 평가 안 받고 근면 성실하게 살았지만 딱 한번 어떤 이에게 "음흉하다"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음흉하다고? 내가?
호불호를 분명하게 말하지 않고 돌려 말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나보고 음흉하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그 자리에서.
그 호불호란 것이 너에게 듣기 편한 것일 텐데 내가 너의 뜻을 맞춰주지 않았다고 음흉하다 소리를 하는 너는 얼마나 사악한 것이냐고 따져 물었다. (엇따대고 평가질이양~)
내 입장에서는 가타부타하기 싫어 애매한 포지션을 유지하는 것이 어째서 음흉하다는 건가. 투표에도 기권이란 것이 있는데. 너의 속이 시원하도록 예스냐 노냐를 까발려줘야 할 의무가 내게 있는 것이냐고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다시 시장 이야기로 돌아가 보고 싶다.
재래시장에 가서 채소를 둘러본다. 왔던 길을 되짚어 한 가게 앞에 멈춰서 상추 따위를 쳐다보고 있다.
싱싱한지 눈으로 재차 확인한다.
저기 앞에 앉은 주인은 그런 나를 흘낏 보고는 하던 일을 하며 한마디 툭 던진다.
"그거 상추 맛있는 거여. 담배상추여."
나는 말없이 몇 초 더 쳐다보다 한 발자국 상추 앞으로 다가선다. 그걸 본 주인이 끙차. 엉덩이를 일으켜 다가온다.
"한 근에 얼마에요?"
내가 묻자 주인이 무심히 까만 봉지 한 장을 톡 뜯으며 "한 근에 사천 원."
흘깃 나를 쳐다보고 대강 상추를 덜어 봉지에 담으며 "한 근만?" 한다.
"한 둬 근 줘요."
픽 웃음이 난다. 두 근이면 두 근이지 한 둬~근은 몇 근이라는 건지 내가 말하고도 우습다. 부모의 말투가. 행동이 나온다.
주인은 말없이 상추 담은 까만 봉지를 건네고 나 역시 묵묵부답으로 돈을 준다. 소리 없이 돌아서는 우리였지만 적당한 가격에 싱싱한 채소를 산 나는 다음번에 또 올 것이고 트집 잡고 깎지 않아 좋았던 주인은 한 줌 더 집어 덤으로 주기 잘했다 싶을 것이다.
좋은 거래였다.
아! 그러고 보니 음흉하다는 말과 함께 차라리 욕을 하라는 말도 몇 번 들은 것 같다.
오래 사귄 남자 친구가 바람을 피웠는데도 헤어질 수가 없다며 나를 불러 술 마시고 자기를 위로해 달라던 친구가 했던 말이다. 내가 그때 뭐라고 말했더라?
"너 저기 육교 보이지?"
"응 보여. 왜? 창식이가 육교에 있어? 나 델러와 써?"
"아니. 너님의 창식이는 지금 양다리 중이시라 바쁘시고요. 내 말 잘 들어. 내 친구야. 너는 있잖아. 지금 저렇게 멀쩡한 육교 내비두고 그 밑에 횡단보도 긋고 있는 거야. 쎄가 빠지게. 그거까지는 좋다 이거야. 너의 자유니까. 그런데 나보고 그 횡단보도에 신호등 세워달라고 하면 되겠냐. 안 되겠냐."
"아. 뭔 소리야. 창식이한테 전화나 걸어. 나 델러오라고오~"
아오... 요골고냥확그냥막아오....
흠흠... 다시 생각해보니. 여보게 친구. 그 창식이란 너의 남친과는 이제 그만 교제를 중단하는 것이 낫겠네.
양다리는 아주 나쁜 행동이지 않은가. 자네가 그 술 깨면 동시에 그 창식군에게서도 깨어나길 바라네.
모든 충청도의 실핏줄들이 나와 같은 성향일 수는 없으나 아무튼 나는.
내가 이렇게 정성 들여 빙빙빙 돌려 말하는 것은 자네와 나의 감정을 상하지 않고 뜻을 전달하기 위함 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