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안 하기만 하면 된다. 안 하기만...
12월이 다가오면 거의 매년 반복하는 것들이 몇 개 있다.
첫 번째로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인생이란 영화를 본다. 두 번째로 김치를 담글지 말지 고민하다 결국 김장을 하고 마는 것이다. 음식을 잘하는 엄마 밑에서 자라면서 요리를 할 일은 별로 없었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요리가 가장 쉬웠다. 해본 적 없는 요리도 레시피를 보고 그럴싸하게 만들었다. 식구라 봐야 둘밖에 없으니 김치는 주로 사 먹지만 매년 이맘때쯤이면 마트의 배추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결국 난 또 배추를 샀다. 이번엔 많이.
올해는 수집하듯 집 바로 옆 마트와 집 멀리 마트에서 배추를 배달시켰다.
배추겉잎을 떼어내고 반으로 갈라 소금을 뿌리고 절인다. 그리고 무를 씻어 자른다. 그러고 나면 잔뜩 흩어진 배추잎사귀를 치우고 스팀청소기를 돌린다. 다음날엔 절인 배추를 꼼꼼히 씻어 물기를 빼고 만든 양념소를 넣어 가득 김치통을 채운다. 잘라둔 무로 뚝딱 깍두기, 생채도 만들고 된장 무장아찌도 만들어뒀다.
꼬박 이틀을 고생하고 허리엔 파스를 붙였다.
아이고 허리야. 이게 무슨 짓이야. 내가 다시는 배추를 사나 봐라.
그래도 내년 또 이맘때면 몇 달 동안 먹을 김치를 또 담그겠지.
초록망속에 들어찬 묵직한 배추를 보면 마음이 급해지겠지.
뽀얗고 탐스런 무를 보면 또 손이 가겠지.
나에게 김장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 먹는 게 더 편하고 쉬우니까 말이다. 그래도 몸 어디 하나 뻐근하게 잔뜩 혹사시키는 일을 매년 이맘때 하고 있다.
살아보니까 말이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기만 해도 인생은 참 쉬울 것 같다.
공부대신 히죽히죽 웃으며 만화책 보는 것도, 헤어질 것을 알면서도 하는 연애도, 확신이 없으면서도 했던 결혼도, 삭신이 쑤실 걸 알면서도 하는 김장도,
그런데 또 보니 말이다. 지금 보니 내가 단단해져 있다. 여리디 여린 나로 살아갔으면 좋았을 수도 있는데 누구와 맞붙어도 내 숟가락 손에 쥔 단단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안 하는 것. 어렵다. 하고 나서 수습할까 한다.
한번 사는 인생. 아무 문제도 고난도 없이 살다 곱게 죽으려고 사는 것도 어쩌면 하지 말아야 할 것 아닐까 감히 생각해 본다. 아니. 애초에 틀렸다. 해보기 전엔 하지 말아야 할 것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그게 인생 같다. 그러니 해보는 수밖에. 행운을 빈다. 내 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