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사랑.
어려서 종종 이모네 집에 놀러 갔던 기억이 난다.
친척이 거의 없다시피 해서 관혼상제를 직접 보고 겪을 일이 없었던 나는 이모네 집에 가는 것이 참 즐거웠다.
유일한 집 밖의 세계였다.
여덟 살 내 눈에 비친 이모는 진한 화장에 세련된 옷차림을 한 딴 세상 사람 같았다.
직업 특성상 제복을 입는 이모부는 강인한 턱선과 눈빛을 가진 군살 하나 없이 잘생긴 미남이었다.
남매였던 사촌들은 구김살 하나 없이 환하고 명랑했고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처음 이모네 집에 가서 놀랐던 것은
여섯 살짜리 딸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면 소리쳐 아빠를 찾는 풍경이었다.
말수가 적고 항상 소파에 앉아 신문을 들여다보는. 지금 생각해보면 제임스 본드 같은 분위기의 이모부는 자신을 찾는 딸에게 벌떡 일어나 달려갔다.
당연하다는 듯이 딸의 뒤처리를 해줬다.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지는 않았지만 이모네 집에서는 누구도 나를 혼내지 않았고 자잘한 심부름으로 괴롭히지도 않았다. 내가 뭘 하든 매서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람도 없었고 오히려 어린애가 의젓하다며 칭찬도 곧잘 들었다.
낯설지만 뿌듯했다.
한참 밖에서 비를 맞고 들어와서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뽀송한 이부자리 속에 누운 기분이었다.
저절로 웃음이 지어지고 장난이 치고 싶어 졌다.
이모는 카스테라를 한가득 만들어주었고 이모부는 내가 한 두 살 어린 사촌들을 데리고 놀아주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여기가 내 집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여기서 계속 있고 싶었다.
이곳에서는 내 어깨가 춤을 추고 뭘 하든 사촌들보다 더 잘할 수 있었다.
나는 벌써 혼자 구구단을 9단까지도 다 외우고 혼자서 가나다라마바사도 할 수 있었다.
나보다 한두 살 어린 사촌들 앞에서 거들먹거리며 너희는 이것도 모르는구나 자랑했다.
너희는 맨날맨날 엄마가 카스테라를 구워주고 아버지가 엉덩이를 닦아주는데도 이걸 못한다고?
나는 그런 거 없이도 혼자 종이를 주워 글을 깨치고 구구단을 외웠는데.
아무래도 내가 너희들보다 더 잘난 것 같아.
어쩌면 너희보다 내가 이 집에 걸맞는 아이인 것 같아.
카스테라를 매일 먹고 내가 부르면 달려와주는 아버지가 있다면 난 더 어려운 것도 할 수 있어.
어느새 작은 내 마음속 깊이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부족한 사촌들이 이 집에서 살고 있는 것이 부당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내가 바로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조그만 여자아이는 검은 마음을 먹었다.
그날도 이모네 집에 놀러 가 여섯 살 일곱 살 사촌들과 놀고 있었다.
집 앞에서 놀던 우리는 길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했고 귀엽다며 쪼르륵 앉아 구경했다.
그러다 여섯 살 사촌이 손을 내밀어 길고양이를 품에 안으려고 했고 순간 길고양이는 여섯 살 사촌의 볼을 사정없이 할퀴었다.
여섯 살 사촌은 앙앙 울어댔다.
일곱 살 오빠는 고양이를 쫓아버렸고 나는 여섯 살 사촌을 집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그리고 곧바로 제복을 입은 멋진 이모부가 퇴근을 했다.
거실에 앉아 울고 있는 여섯 살 딸을 보더니 깜짝 놀라 그 긴 다리를 순식간에 구겨 앉으면서 아이를 품에 안았다.
"왜 그래? 왜 그래? 우리 딸내미 왜 울어. 얼굴이 왜 이래?"
아이는 우느라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에그... 아버지가 물어보는데 또박또박 말을 해야지. 울고만 있네..
나는 곧바로 옆에서 침착하게 왜 우는지 알려드렸다.
"놀고 있는데 길고양이가 와서 같이 구경했어요. 안 만지고 보기만 해야 하는데 만져서.
그래서 고양이가 할퀴었어요."
이모부는 계속 사촌을 바라보며
"고양이가 이랬어?"
물어보신다.
아이참. 그랬대도요.
"네. 고양이는 작았어요. 물지는 않았고요."
나는 다시 또박또박 얼른 말씀드렸다.
그러자 이모부가 그제야 사촌에게서 눈을 떼고 굳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몇 마디를 던졌다.
"너는"
"너는 뭐하고..."
"너는 은지가 다칠 때 뭐 하고 있었어?"
"애 안 보고 뭐 하고 있었어?"
순식간에 가슴이 쪼개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직 나는 여덟 살인데. 그 순간 내가 느낀 감정은 분명 수치스러움이었다.
싸늘한 이모부의 눈동자는 본분을 잊어버리고 검은 마음을 품은 나를 보고 있었다.
그때 마침 화장실에서 이모가 나왔고 이모부와 같이 약을 찾을까 병원을 갈까 소란이 일었다.
나는 조용히 그대로 이모집을 나와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잡동사니가 잔뜩 쌓인 다락방으로 올라간 나는 한참을 울었다.
울고 또 울었다.
마치 아버지와 어머니가 죽은 것처럼 울었다.
다락방 창문이 까매질 때까지 죽은 듯이 엎어져있었다.
글도 잘 읽고 구구단도 잘 외우는 조그만 여자아이는
평생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게 무엇인지도 스스로 깨우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