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만의 쉼표, 나는 달리고 쓰고 먹으며 채운다

퇴사 25일 차, 오늘의 일기

by 김시온

매주 목요일은 교회 청년부 찬양팀 연습 날이다. 이번 주는 설 연휴와 팀원의 근무 일정을 고려해 수요일인 오늘 모였다. 비전공자들로 구성된 우리 밴드에게 이번 선곡은 꽤나 도전적이었다. '위러브 - 우리가 주를 더욱 사랑하고'와 '기프티드 - 내 몸은 구주의 성전이니'. 요즘 CCM 씬을 이끄는 실용음악 전공자들의 화려한 연주를 레퍼런스로 삼았으니, 난이도가 역대급일 수밖에.

하지만 걱정은 기우였다. "어렵다, 어렵다" 하면서도 합을 맞춰가는 팀원들의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기타, 드럼, 건반을 조금씩 다룰 줄 아는 나는 그 미소 뒤에 숨겨진 물집 잡힌 손가락의 고통을 안다. 리더로서 해줄 수 있는 건 닦달이 아닌 격려뿐이었다. "실전에서는 딱 지금 틀린 만큼만 틀리자." 우스갯소리 같은 내 위로에 베이스 치는 친구가 고마워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엇박자를 감싸 안으며 하나의 소리를 만들어냈다. 어떻게든 완성되어 가는 곡에 신나서 연습했다.


고된 연습 끝에, 이번엔 몸을 쓰는 합주가 이어졌다. 교회 친구, 드럼 치는 동생, 그리고 나. 셋이서 10km 러닝에 도전했다. 10km는 거의 4개월 만이었다. 내심 자신만만했다. 동생은 5km만 뛰던 '초보 러너'였기에, 경험자인 내가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하며 뒤에서 밀어줄 생각이었다. 예전에 내가 처음 10km를 뛸 때 친구가 도와줬던 것처럼 멋진 형 노릇을 하려 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동생은 생각보다 훨씬 잘 달렸고, 7km 지점부터 내 호흡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점점 그 둘의 등이 멀어지기 시작했고 마지막 500m가 남았을 때 저 멀리서 둘이 대화를 나누며 속도를 올리는데, 나는 그들의 등판을 보며 죽을힘을 다해 쫓아가야 했다. 10km 내내 불어닥친 맞바람이 내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겨우겨우 완주. 기록은 1km당 5분 58초. 한창때의 5분 40초와 비교하면 18초나 느려진 속도다. 고작 18초 차이라지만, 내 몸뚱이는 그 간극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부상이 없다는 것. 머리는 잊었어도 근육은 10km를 기억하고 있었다.


허기진 배를 채우려 롯데리아로 향했다. 키오스크 앞에서 친구들은 익숙하게 쿠폰을 찾아 할인을 받았다. 돈 버는 직장인들도 아껴 쓰는데, 백수인 나는 정작 쿠폰이 없어 정가 메뉴 앞에서 손가락이 멈칫했다. 다행히 친구가 남는 쿠폰을 건네주어 나도 '할인 대열'에 합류했다. 원하던 메뉴는 아니었지만, 땀 흘린 뒤 먹는 햄버거는 메뉴를 불문하고 옳았다. 먹는 것도 잘 먹어줘야 한다. 배고픈데 돈이 없는 것만큼 서러운 게 또 있을까 싶다. 당장 돈이 없지는 않지만 사업한다고 모아둔 돈이 아주 타이트하게 준비되어 있다. 한 푼이라도 아끼는 노력이 필요하다.

퇴사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다. 무계획적인 퇴사도 아니고 나름의 로드맵을 가지고 나왔음에도, 문득문득 예고 없는 불안과 무기력함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달렸다. 오늘 10km를 완주하며 느낀 해방감은 그 어떤 위로보다 강력했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이 불안을 밀어냈다. 이 자기 효능감은 나를 다시 움직이게 했다. 집에 오자마자 분리수거를 하고,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미뤄둔 사업계획서를 열었다.

기분 좋은 김에 <다크 나이트>나 <인터스텔라>를 다시 볼까 싶었지만 대신 키보드를 잡았다. 이 충만한 기분을 소비하는 대신 기록하고 싶었다. 영화는 언제든 볼 수 있지만, 오늘의 이 감각은 휘발되니까. 나는 지금 기분 좋은 백수다. 11년 만에 처음 찾아온 이 달콤한 휴식을, 그저 흘려보내지 않고 유익한 것들로 꽉꽉 눌러 채우고 있다. 달리고, 먹고, 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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